남성미가 강조되는 스포츠에서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는 이제 낯선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피나는 노력으로 혼자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딱딱하게 비칠 수 있는 스포츠를 다루며 흥미 있는 진행과 상큼한 외모를 무기로 팬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팬들은 '스포츠 여신'이라는 타이틀로 이들의 노력을 반기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치고 올라오는 후배, 시청률에 좌우되는 프로그램 진행 등으로 여성 아나운서의 설 자리는 여전히 좁다. 전문성을 갖추기도 전에 자의든 타의든 생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원 시스템을 말하는 이는 적다. 방송사별로 많은 자원이 쏟아지고 기존 인력과 생존 경쟁을 벌인다. 시청률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현 방송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행 능력과 전문성보다는 외모와 몸매에 초점이 쏠리게 된다. 급변하는 방송 현실에 맞춰야 하는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는 MC나 다른 길을 택한다. 최근에도 간판급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의 퇴사가 연이어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팬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스포츠를 버리고 다른 분야로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냐는 미심쩍은 눈초리다. 여전히 전문성은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가 가지고 있는 숙제다. 지난해 프로야구 현장 리포팅으로 이름을 알린 홍재경(26) SBS 스포츠 아나운서는 이제 갓 2년차가 됐다. 아직은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홍 아나운서는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로서 느낀 지난해 소회, 앞으로 미래, 꿈에 대해 털어놨다. <더팩트>는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홍 아나운서를 만나 그간 알려지지 않은 '홍재경'과 '홍재경 아나운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늘어난 인기? 허니버터칩으로 실감했다."
- 지난해 보낸 소감
부담이 매우 컸다. 야구 인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야구팬 가운데 전문가가 많다. 저 같은 초짜가 행여 실수라도 저지르면 어쩌나 소심해졌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현장 가서 자꾸 조심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낮은 자세로 있으니 배우는 것도 많았다. 저 자신을 잃었지만 돌이켜보면 얻은 게 많다.
- 인기도 많이 늘었을 텐데.
허니버터칩을 예로 들어도 될까. (웃음) 다섯 봉지 정도 먹었는데 제 손으로 사 먹어본 적이 없다. 모두 팬들이 보내주셨다. 제가 팬의 '챙김'을 받고 있다고 비유하면 웃긴가. 농담이다. (웃음)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고 좋아하는구나 느꼈다. 지난해 진행한 '야구남녀'란 프로그램을 팬들이 굉장히 좋아해 주셨다. 심지어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을 전에 한번 우연히 봬서 인사드렸는데 "홍재경 아나운서가 '야구남녀' 하고 있죠. 잘 보고 있어요"라고 하셨다. 차 위원님과 팬 모두 워낙 좋은 취지로 나가는 프로그램이라 좋게 평가해주신 거 같다.
- 지난해 야구남녀, 스포츠S 등 여러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첫해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운이 좋았다. 야구남녀로 연기도 하고 스포츠 S로 스튜디오 진행을 하고 야구 현장도 갔다. '스포츠 피플' 인터뷰로 많은 이도 만났다.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 사실 할 땐 너무 힘들었다. 야구는 월요일에 쉬는데 이날 스포츠 S를 진행했다. 목요일 하루 정도 쉬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은 야구 현장에 있었다. 정신없이 시간이 갔는데 돌이켜 보니 많은 기회가 있었다.
- 요즘 일과는 어떻게 되나. 쉬는 날엔 주로 뭘 하는지.
요즘엔 지난달부터 계속 배구장을 다니고 있다. 쉴 땐 운동을 좋아해 매일 한다. 연애를 안 해서 모든 취미 생활을 운동으로 한다. (웃음) 일주일에 두 번은 발레, 일주일에 한 번은 탁구, 일주일 한두 번은 골프를 친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매일 한다. 출장 가면 30분 정도, 출장 안 가면 2~3시간. 운동을 하루에 3시간씩 하는 거 같다. 요즘 경기장 가기 전에 운동하는데 배구장 이동 거리가 멀어서 많이 하지 못한다. 적어도 경기장에 3시간 전 도착해야 한다. 자료 정리하고 인터뷰 준비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 본인은 '야구 여신'인가.
음. 여신은 경기장 치어리더 언니들인 거 같다. (웃음) 몸매도 좋고 예쁘다. 그들이 여신이다. (웃음) 아나운서인 저는 그 옆에 있어서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 같다.
◆ "많은 팬이 좋아하는 스포츠 현장에 있는 건 축복받은 일."
- 스포츠 아나운서 일하면서 어떨 때 보람을 느끼나.
사실 힘들 때가 많다. 지방 현장을 다니면 정말 야구나 배구를 사랑하시는 분이 많다. 이분들은 일과를 쪼개서 단지 야구와 배구가 좋아서 오신다. 반면, 저는 제 일이 야구나 배구를 직접 보는 거다. 친한 언니가 야구팬인데 저를 정말 부러워했다. 이런 걸 보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하는 건 축복받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 현장에 있다는 게 보람되고 부모님이 모니터링해주시는 것도 행복하다. 방송 일을 하게 됐을 때 제가 일하는 것을 부모님이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자부심을 많이 느낀다.
- 지난해 야구 아나운서로 시간을 보냈다. 야구가 어렵지 않나.
정말 어렵다. 최근 기록 강습회에 갔는데 한마디로 '멘털 붕괴'였다. (웃음) 야구는 정말 알면 알수록 어렵다. 프로 2군의 어린 선수들도 규정이 헷갈린다고 한다. 저도 전문적인 아나운서가 되고 싶지만, 완전히 규정을 숙지하려면 정말 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선수랑 좀 친해졌나
다른 아나운서들보다 친하진 않은 거 같다. 그간 여성 아나운서와 선수의 열애설 등 관계에 워낙 말이 많지 않았나. 정우영 선배에게도 많은 조언을 들었다. 제가 이 일을 사랑하고 아직 이룬 게 없는데 섣불리 팬에게 잘못 비치면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저는 남녀 사이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경기장에서 보니 말을 몇 번 한 선수들도 있다. 적극적으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해보고 싶다. 지난해 제가 너무 소심했다. 욕심내지 못하고 열정 없어 보였다면 올해는 2년 차다운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
- 지난해 프로야구 해외 전지훈련도 함께 갔는데.
입사 한 달 후 떠난 거다. 여성 아나운서와 선수 관계가 많이 주목받을 때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 때문에 선수한테 마치 말이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웃음) 선수가 앞에 있는데 말을 걸면 안되는 줄 알고 해설위원님을 거쳐서 할 정도였다. (웃음) 회사 선배를 봐도 친한 선수들이 많다. 선배들이 봐도 어색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기까지 엄청나게 노력한 시간이 있을 거다. 저도 지금 그런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거다. 지난해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
- 스포츠 아나운서. 팬이 항상 지켜보는 자리다.
스포츠 아나운서는 팬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긁어줘야 한다. 구단과 함께 살아가는 골수팬이 보면 '왜 저런 걸 물어보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항상 팬 반응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편이다. 인터넷으로 팬 질문을 올려달라는 기사를 보면 종목에 상관없이 보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아 팬들은 여러모로 보고 있구나'라고 느낀다. 팬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
- 팬 반응 가운데 안 좋은 것도 있다.
저는 항상 댓글을 다 읽는데 '성괴(성형 괴물)'가 가장 많더라. (웃음) 인증 한번 했으면 좋겠다. 코를 한번 비틀던가. (웃음) 대학교 때 방송에 한 번 나갔는데 '홍재경 얼굴 변천사'로 인터넷에 많이 떠돌았다. (웃음) 방송에 민얼굴로 나올 수도 없고 언제 기회가 되면 엑스레이라도 찍고 싶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인터뷰 내용 가지고 욕먹진 않으니 '얼굴로만 욕먹자'고 생각한다. (웃음) 상처도 받는데 그러려니 한다. 아직 덜 유명해서 댓글도 많지 않다. (웃음) 팬이 댓글로 인터뷰 보완해야 할 부분을 지적하면 보고 고치려고 한다.
◆ "여성 아나운서라면 전문성뿐만 아니라 외모도 중요."
- 여성 아나운서는 외모로 주목받는다. 반면, 스포츠는 전문적인 분야다. 흔히 여성 아나운서는 예쁘지만,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한다.
저는 여성 아나운서라서 겉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위에서도 외모를 더 부각할 때가 있다. 전문성 못지 않게 외모가 뜨다 보니 전문성이 노출되는 게 적다. 남자 스포츠 아나운서와 달리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는 진행하면 경기 내용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도 신경 써야 한다. 물론 둘을 제대로 배분하지 못하면 팬이 우려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 여성 아나운서가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
최근 KBSN의 정인영 선배가 배구 캐스터로 중계하는 걸 봤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필드 리포팅만 하다가 중계를 보니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을 거라 짐작한다. 우리 회사 장유례 선배도 당구 중계한다. 옆자리에서 보면 대단하다. 저 역시 경기장에 가면 화면에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다. 외적 부분만 신경 쓴다고 하면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하지만 숙명이다. 아나운서에게 전문성과 외모 모두 필요하다. 외모에 신경 쓴다는 비판이 싫어 배구장 갈 때 바지만 입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웃음) 야구 선수가 2년차 징크스가 있는 것처럼 2년차 아나운서는 어려운 거 같다.
- 회사 선배였던 배지현, 신아영 아나운서가 떠났다.
앞으로 저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이 떠나면서 주위에서 좋게만 비치지 않는 거 같다. 회사를 떠나면 알아서 온전히 자기가 다 책임져야 한다. 사실 나간 선배들은 모두 능력이 있어서 나간 거다. 저도 실력을 채워 그들처럼 발전할 수 있느냐는 여러 고민을 한다. 제 앞날도 그려본다. 저도 회사에 남을 수 있지만 언젠가 자의나 타의로 선택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요즘엔 A에서 D까지 미리 선택안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 여성 아나운서 수명은 짧다.
회사에서 사람이 계속 나가고 바뀐다. 저도 살아남고 싶다. 하지만 여성 아나운서 환경이 그렇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환경에 맞는 선택을 하는 거다. 요즘엔 팬도 이런 사정을 많이 아시는 거로 안다. 사실 새해가 오면서 두려운 마음이 든 건 올해가 처음이다. 지난해만 해도 제 미래는 창창하다고 느꼈는데 올해 유독 나이 먹은 거 같다. 올해 회사에 지원하는 사람을 보니 더 그렇다. 생년월일 앞자리가 다르다. (웃음) 지원하는 사람을 보니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 스포츠, 일과 취미 가운데 어느 쪽인가
정우영 선배가 강조한다. 야구를 삶에 녹이라고. 평소에도 관심을 두라고 하시는 데 정말 대단하다. 저는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쉴 때는 야구를 틀기도 싫었다. 하지만 안보니까 흐름이 끊기더라. 최근에 헬스클럽에서 뛰고 있는데 제가 어느새 배구를 보고 있었다. (웃음) 다들 드라마나 예능 보는데. 쉴 때도 타 사 아나운서 선배를 꾸준히 모니터링한다. 스포츠 아나운서는 스포츠를 정말 좋아해야 한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운동하는 걸 좋아한 게 지금 많은 도움이 된다.
- 야구 말고도 하고 싶은 종목이 있나.
다른 종목도 하고 싶고 한 종목만 제대로 하고 싶기도 하다. 지금은 골프도 해야 하고 야구, 농구, 배구도 해야 한다. 제 분야를 정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둘 다 장점이 있다. 주력으로 하면 더 인정받을 수 있다. 여러 종목을 왔다 갔다 하니까 종목을 파악하는 게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 "스포츠? 일과 취미 넘은 '삶'이 돼야 한다."
- 기상캐스터도 했다.
K웨더에 두 달 있다가 JTBC 기상캐스터 시험을 보러 갔다. 모델, 미스코리아 출신이 많을 정도로 예쁜 이들이 많았다.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다. (웃음) 당시 보도국 사장님이 손석희 사장님이셨는데 저를 좋게 봐주셨다. 저는 '손이 뽑은 아이'였다. (웃음)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790대1의 경쟁률을 뚫었다. 정말 놀랐고 감사했다. 방송에선 작은 일이라도 직접 보고 배우면 도움되는 게 많다. 모두 좋은 경험이었다.
- 아나운서를 하고 싶었던 이유
대학교 1~2학년 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3학년 때부터 꿈을 꿨다. 사실 고등학교 때 PD가 되고 싶었다. 2007년 언론인 카페에 가입할 때 지망하는 직군을 PD라고 적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어서 행사가 많았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진행할 때 쾌감을 느끼고 기분이 좋았다.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더라.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매력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다.
- 아나운서 전까지 스포츠는 어떤 존재였나
스포츠를 직접 하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5살 때부터 발레를 했고 7살 때 수영을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태권도를 했고 중학교 1학년 때 특공무술을 배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해동검도와 탁구를 했고 대학교 들어가서 검도, 스쿼시, 골프를 시작했다. 운동과 저는 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몸으로 하는 걸 좋아했지 직접 보는 건 적었다. 초등학생 때 프로축구 수원을 좋아해 고종수 선수 유니폼을 입고 갔고 대학생 땐 두산과 LG 경기를 친구와 몇 차례 갔다. 당시엔 스포츠 아나운서 꿈꾼 게 아니라 응원하러 갔다. (앞으로는 어떤 의미일까.) 일이면서 취미다. 제가 계속 스포츠로 밥은 먹는다면 스포츠는 취미랑 직업의 측면이 넘어서 삶이 돼야 한다. 쉴 때 보기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고. (웃음) 물론 쉽진 않다.
- 어떤 선배가 되고 싶나.
입사 이후 얼마 안 가 배지현 선배가 회사를 떠나셔서 궁금한 걸 많이 못 물어 봤다. 김세희 선배도 야구보단 배구장에 많이 가셨다. 물어볼 사람이 많지 않아 입사 초반 힘들었던 거 같다. 이번엔 신입 들어오면 첫 후배다. 제가 대학교 때 학부여서 후배가 없었고 기상캐스터 할 때도 막내였다. 대학교부터 한 번도 후배가 없었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저 먼저 어려운 점을 겪어서 잘 해주려고 한다.
- 앞으로 꿈과 목표
다이어트다. (웃음) 야구장에서 운동화 신으려면 몸매가 좋아야 한다. 좀 더 팬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 선수들이랑도 더 친해져야 한다. 위원님도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거다. (웃음) 2년 차 징크스가 없었으면 좋겠다. 여성 아나운서도 기자분들이 인터뷰하는 거처럼 똑같은 장소에서 일한다. 올해는 아나운서가 아니라 기자가 되려고 한다. 전문적인 인정을 받고 싶다. '나는 기자'라고 생각하고 일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