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대중가요 등에서 복고 열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중·장년 스포츠 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행사가 17일 열린다. 장소는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장충체육관이다.
글쓴이가 청소년 시절, 장충체육관에 가려면 우이동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동대문까지 간 뒤 청계천을 건너 을지로를 지나 30분 가까이 걸어야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귀가해야 했지만 언제나 즐거운 마음이었다.
박정희장군배쟁탈동남아여자농구대회와 요즘은 열리지 않지만, 해마다 3월 새 학기에 치르던 농구 OB 연고전 그리고 한일고교교환경기대회 등 수많은 경기를 장충체육관에서 지켜봤다. 김일과 천규덕 등이 출전한 프로 레슬링 경기는 본 적이 없다. 입장료가 비싸서 그랬는지, 아무튼 그랬다.
1979년 6월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스포츠 기자가 된 뒤, 처음으로 장충체육관에 공짜로 들어가 취재한 대회는 1980년 5월에 열린 제 12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였다. 그 뒤로 또 수많은 경기를 이번에는 팬이 아닌 기자로 지켜봤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도 종목에서 60kg급 김재엽과 65kg급 이경근이 금메달을 따던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재엽은 마침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상대에 올랐다. 태극기 양쪽 아래로 성조기(케빈 아사노, 일본계 미국인), 낫과 망치가 그려진 옛 소련 국기(아드리안 토티카시빌리, 그루지아 선수지만 소련 대표로 출전) 그리고 일장기(호소가와 신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게양되던 장면 역시 생생하다.
한국 실내 스포츠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충체육관이 개장 반세기 만에 복합 문화 체육 시설로 재탄생한다. 2012년 5월 리모델링을 시작한 지 2년 8개월 만이다. 리모델링을 거치며 지하 1층∼지상 3층(전체 면적 8385㎡)에서 지하 2층∼지상 3층(1만1429㎡) 규모로 커졌고 4507석의 관중석을 갖췄다. 1960년대 중계방송에서는 아나운서들이 1만여 관중이라고 했으니 ‘뻥’이 좀 섞였다.
신설된 지하 2층엔 보조 경기장과 헬스장을 비롯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생활 체육 공간이 들어섰다. 예전에 장충체육관을 찾았던 스포츠 팬들은 워밍업을 할 수 있는 보조 경기장이 없어 체육관 1층을 빙 두른 복도에서 달리기를 하던 선수들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에 있는 체육관 가운데 보조 경기장이 마련된 건 1979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열린 잠실체육관이 처음이다.
주 경기장 바닥 길이를 36m에서 47m로 늘려 모든 실내 종목 경기를 열 수 있게 됐다. 바닥을 가장 길게 쓰는 핸드볼 경기도 가능해졌다는데 1970년대에는 비좁은 가운데에도 한일고교교환경기대회 핸드볼 종목을 이곳에서 치렀다.
서울시가 밝힌 개장식 참석자 명단을 보면 중·장년 스포츠 팬들은 저절로 추억에 잠길 듯하다. 신동파 박찬숙(이상 농구) 홍수환 박종팔 김광선(이상 복싱) 이왕표 노지심(이상 프로 레슬링) 장윤찬 마낙길(이상 배구) 임오경(핸드볼) 등이다.
여자 프로 배구 GS칼텍스가 19일 도로공사와 리모델링 개장 경기를 갖는다. GS칼텍스는 애초 2013~2014년 시즌부터 장충체육관에서 다시 홈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리모델링 공사가 지연돼 평택시 이충문화체육센터 체육관을 임시 홈 경기장으로 사용해 왔다.
장충체육관을 지붕이 있는 체육 시설의 원조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1960년대 이전에도 체육관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YMCA, 평양 숭실전문학교 등에 실내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규격에 맞는 실내 코트가 없어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옥외 코트에서 치렀다.
장충체육관은 원래 그 자리에 옥외 코트가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들이 스모(일본 씨름) 경기장을 세우려고 확보해 놓은 터였다. 해방 이후 서울시의 협조로 그 자리에 옥외 코트가 들어섰고, 한국은행이 농구대를 기증했다. 이후 민간 차원에서 실내 코트 건설 움직임이 있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뒤 옥외 코트이긴 하지만 마루가 깔리고 관중석이 설치된 경기장이 육군의 주도로 건립됐다. 요즘 ‘다시 보는 대한늬우스’에 이따금 등장하는 마루가 깔린 옥외 코트에서 펼쳐지는 농구 경기가 바로 이곳에서 열렸다.
그 무렵 나라의 경제력으로 볼 때 큰 규모의 체육관을 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1960년 3월 서울시는 900여만 원의 예산으로 기공식을 한데 이어 공사비 9200만 원을 투입해 1963년 2월 1일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장충체육관을 완공했다. 필리핀의 원조로 지었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더팩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