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양의 해' 을미년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대형 이벤트가 많았던 2014년에 이어 2015년에도 스포츠 세계의 잔잔한 감동 드라마가 이어진다. 굵직한 대회는 적지만 1월 아시안컵, 6월 여자 축구 월드컵, 7월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비롯해 종목별 올림픽 예선과 세계선수권대회가 치러져 열기를 더할 예정이다. 주어진 기회를 지렛대 삼아 내일의 도약으로 삼으려는 유망주들은 조용한 칼날을 간다. 이들에게 대회 명성은 중요치 않다. 모든 경기가 이름을 날릴 새로운 장이자 도전이며 과제다. 2015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기 위해 질주하고 있는 '될성부른 떡잎'을 먼저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이미 '선배 뺨치는' 실력을 갖춘 멋진 후배들이 기지개를 켤 준비를 마쳤다. '내일은 최고'를 꿈꾸며 기량을 갈고닦고 있는 '예비 스타'들을 <더팩트>에서 <신년인터뷰> 기획 코너로 미리 만나 본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잠실 = 이준석 기자] 188cm, 130kg. 한국 종합격투기 역사에서 이런 신체조건을 지닌 선수는 매우 드물다. 217cm, 140kg의 '골리앗 파이터' 최홍만(34)은 종합격투기보단 입식타격에 입각한 파이터였다. 그만큼 희귀한 신체조건이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도 흔하지 않을 정도다. 덕분에 한국의 종합격투기 수준이 세계 무대를 넘볼 수도 있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 주인공은 바로 '괴물 파이터' 심건오(26·팀피니쉬)다.
등장부터 강렬했다. 후퇴는 없었다. 무한 전진으로 프로 파이터와 당당히 맞섰다. 심건오는 작년 9월 23일 XTM '주먹이 운다-용쟁호투'의 '지옥이 3분'이란 코너에서 괴물처럼 강한 힘과 적극적인 몸놀림으로 격투기 팬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열매는 달콤했다. 정문홍 로드FC 대표로부터 즉석에서 "당장 계약하길 원한다"는 영광의 말을 들었다.
출발도 산뜻했다. 지난 11월 9일 로드FC 019 제1경기 -130kg 헤비급 매치 슈퍼파이트 프레드릭 슬론(33·최무배짐)과 대결에서 2라운드 1분 16초 키락에 의한 TKO 승을 거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고작 1전을 치렀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정상을 향해 오르겠다고 했다. 심건오는 작년 12월 23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한국의 마크 헌트(40·뉴질랜드)가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포부를 밝혔다.
◆ 우연히 만난 '주먹이 운다'
- 레슬링을 오랫동안 했지만, 대중에게 심건오라는 이름을 알린 것은 '주먹이 운다-용쟁호투'의 '지옥의 3분'이란 코너였다. 어떤 계기로 출연했나.
레슬링을 그만두고 운동을 아예 그만두려고 했다. 인연을 이어 가기 싫었다. 하지만 괴로웠다. 잠도 못 잤다. 하루에 두 시간 잤다. 아무래도 운동이 '천성'이었던 것 같다. 다시 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김대환(36·김대환MMA복싱) 관장님을 찾아갔다. "네가 좋아하는 걸 해 볼래"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결심했다. 내게 새로운 목표는 '주먹이 운다-용쟁호투'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 신체 조건 덕분에 유리한 점은 없었나.
'주먹이 운다'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맞는 상대가 없었다. 체구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희귀한 신체 조건이다 보니 방송에서도 나만의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제작진이 "흔하지 않은 신체 조건"이라고 좋아했다. 다행히 결과도 좋고 프로 데뷔에도 성공한 것 같다.
- 평생 레슬링을 했다. 종합격투기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원래 떨거나 초조해하는 성격이 아니다.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종합격투기에 발을 뗀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웠다. 현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나를 주목했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 할 일을 하고 장점을 발휘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다행히 정문홍 대표가 좋게 봐주셨다.
- 즉석으로 영입 제안을 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짜인 각본'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사실과 다르다. 정 대표를 처음으로 본 자리였다. 일면식도 없었다. 짜인 각본이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방송에 나온 그대로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로드 FC 데뷔 제안을 받은 것이 맞다. 감격스러웠다. 그 기분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 레슬러에서 종합격투가로!
- 13년간 해온 레슬링과 아쉽게 이별했다. 어떤 이유였나?
2014년 1월 2년간 몸담은 레슬링팀인 평택시청이 해체됐다. 깜짝 놀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정 악화가 심해졌기 때문으로 안다. 운동부를 많이 줄였다. 5개에서 2개로 없앴다. 그 가운데 요트와 레슬링팀이 해체됐다. 훈련 조건도 열악했다. 용인대나 백석대, 경기체고에 가서 훈련했다. 시청에선 메달을 못 따서 해체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4명이서 꾸준히 메달을 땄다. 여전히 아쉽다.
- 짐을 쌀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당연히 아쉬웠고 섭섭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레슬링을 그만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단순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갈 때가 됐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어렸을 때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많아 상대의 상황을 헤아리려고 한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아픈 경험을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탓이 아니다. 내 탓이다.
- 레슬링을 그만둘 때 종합격투기로 전향할 것으로 바로 마음먹었나.
아니다. 아예 운동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해온 것이 바로 운동이지만, 내 길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순리대로라면 평생 레슬링을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 팀이 해체된 상황에서 다른 팀을 알아 보는 것도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한동안 실컷 놀았다. 친구들과 많이 만났다. 하지만 간간이 심심풀이로 운동했다.
- 평택시청이 2015년에 다시 레슬링부를 신설한다.
올해 1월에서 2월 사이에 생긴다고 들었다. 다시 오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다시 갈 생각은 없다. 이제 내 목표 레슬링이 아니다. 종합격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욕구를 풀고 싶다.
- 프로 데뷔전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했나.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하루라도 빨리 옥타곤에 오르고 싶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오랫동안 레슬링 했기 때문에 종합격투기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원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다. 새로운 무대에 대한 도전 욕구 덕분에 초조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생각만 했다.
- 종합격투기로 전향한 것은 2014년 6월이다.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사실이다. 타격에 익숙지 않아 힘들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취미 삼아 종합격투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복싱 선수들과 간간이 스파링도 했다. 물론 처음 배울 때도 만만치 않았다. 많이 맞았다(웃음). 훈련할 때 타격과 실전에서 타격은 분명히 다를 것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많이 스파링했다.
-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나.
괴롭거나 어려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종합격투기 특유의 리듬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만한 신체 조건을 가진 상대가 없어 아쉬웠다. 훈련의 애로사항이었다. 간간이 서울에 올라온 이유였다. 싸비MMA멀티짐에 가서 이재선 관장에게 많이 배웠다. 분당에서 김대환 관장에게도 지도받았다. 덕분에 타격에 많은 도움이 됐다.
◆ '신예파이터'의 각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린다"
- 프레드릭 슬론과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어떤 느낌이었나.
사실 레슬링 할 때 흥분과 긴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로드FC 데뷔전에선 전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졸렸다. 빨리 끝내고 자고 싶었다(웃음). 감량하는 것은 힘들었다. 13kg을 뺐다. 헤비급 계약 체중인 120kg으로 뛰었다. 경기 뒤 푹 자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섭취하고 싶었다.
- 초반에 많이 맞았다.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난타전을 하지 않으려 했다. 슬론의 주먹이 강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하지만 초반에 많이 맞아서 흥분했다. 로킥을 맞다 미끄러워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다시 넘어졌다. 충격으로 쓰러지진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난타전에서 맞았을 떈 충격을 입었다(웃음). 주먹이 엄청 강했다. 하지만 레슬러들은 후퇴하지 않는다. 같이 치고 들어갔다. 정신을 잃지 않아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
- 어떤 식으로 경기를 풀어야겠다고 판단했나.
많이 맞다 보니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레슬링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했다. 나름대로 베테랑이다. 위기 대처 능력이 자연스레 생겼다. 타격전은 힘들기 때문에 그라운드로 끌고 가려 했다. 맞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아프더라(웃음). 어떻게 해서든 그라운드로 전환해야겠다는 마음가짐 덕분에 승리한 것 같다.
- 경기 뒤 지인들에게 어떤 말을 들었나.
다들 웃더라. 어디서 그런 맷집이 생겼느냐고 했다. 민망했다. 타격 연습을 많이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앞으로 치를 경기에서 더 맞겠지만, 요령이 필요할 것 같다.
- 솔직하게 말해 보자. 종합격투기에서 본인과 장단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레슬링 기술과 뛰어난 맷집을 보유한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거쳐야 할 게 많다. 가장 필요한 것은 타격 기술이다. 실력이 단숨에 늘진 않을 것이다. 예리하거나 빠르게 치진 못할 것이다. 치고 빠지는 스타일로 전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방, 한 방 공을 들여 뻗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정교하게 쳐야 할 것 같다. 헤비급에선 '스쳐도 한 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타격은 어차피 부수적인 무기다. 조금씩 다듬으면 분명히 큰 무기가 될 것이다.
- 그라운드 상황에서 밑에 깔렸을 때 파운딩에 대처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
맞는 것은 두렵지 않다. 파운딩은 전혀 무섭지 않다. 맞으면 맞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릴 것이다. 성격이 단순하다. 모 아니면 도다. 화끈하게 이기고 한 방에 진다. 사실 고쳐야 할 부분이다. 성격대로 경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 그러다가 한 방에 KO패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웃음). 큰 문제다. 조금씩 보완할 예정이다.
- 종합격투기에서 레슬링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 같은가.
많이 도움된다. 하지만 종합격투기에서 레슬링 기술은 좀 다르다. 팔을 쓰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밑에 깔렸을 때 등을 최대한 많이 들어야 한다. 브릿지(순간적으로 튕겨서 일어나는 기술)를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기술이다. 하지만 레슬링할 때 하루에 100번씩 했다. 종합격투기에 접목하는 것은 내 과제다.
◆ 한국의 마크 헌트를 향해
- 평소 롤 모델이 있나.
많은 선수를 동경한다. 케인 벨라스케즈(33·미국)와 주니어 도스 산토스(31·브라질), 피터 아츠(45·네덜란드), 제롬 르 밴너(43·프랑스) 등 닮고 싶은 이들이 매우 많다. 하지만 마크 헌트를 가장 좋아한다. 그처럼 되는 것이 꿈이다. 한국의 헌트가 되고 싶다. 그처럼 강력한 주먹을 갖고 싶다. 궤적이 큰데 정확하다.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노력하겠다. 그러고 보니 몸도 비슷하다(웃음).
- 한국판 블록 레스너(38·미국)라는 이야기도 있다.
민망하다. 몸의 근육 자체가 다르다. 레스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자란 것이 매우 많다.
- 만약 UFC에서 데뷔 제안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바로 응할 것이다. 생각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격투가의 꿈이 UFC 옥타곤에 오르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도라도 재미 있는 경기를 펼치고 싶다.
- 누구와 가장 겨뤄보고 싶나.
주니어 도스 산토스다. 한 방 맞으면 말 그대로 '옥타곤에서 잘 것 같다'는 느낌이 감돈다.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벨라스케즈의 주먹은 맞고 싶지 않다. 후유증이 심할 것 같다. 하지만 UFC의 데뷔 제안을 받으면 그 누구와도 싸우고 싶다.
- 자신감이 대단하다. 근거 있는 자신감인가.
당연하다. 어차피 그들이 날 죽이지 못할 것이다. 흉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들끼리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이다. 두렵다면 종합격투기로 전환하지 않았을 것이다.
- 훈련하지 않을 땐 주로 무엇을 하는가.
영화를 감상한다. 최근엔 '국제시장'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요'를 감명깊게 봤다. 특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요' 시작할 때부터 울어서 영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덩치는 큰데 감수성이 풍부하다. 잘 운다. 공상과학은 좋아하지 않는다. 공포 영화도 싫어한다.
- 영화 보며 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덩치와 관계없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나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자주 우는 것 같다.
- 격투기 영화도 즐겨 보는가.
'챔피언'을 많이 봤다. 격투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남자로서 어떤 식으로 인생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느꼈다. 영화처럼 인생을 살 순 없다. 하지만 참고해볼 만 하다.
- SNS에 악성 댓글이 자주 달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이다. 얼굴이 알려지니까 아무 이유없이 SNS에 악플다는 사람이 생겼다. 생각보다 꽤 많다. 사실 상처 받는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깜짝 놀랐다. 별다른 이유없이 악플이 달리니까 주눅이 들었다. 정말 심한 욕을 하시는 분들은 자제하시길 부탁한다.
- 고소할 생각은 없나.
없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니까 심한 말을 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악플을 다셨으면 좋겠다. 그걸 보면서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 그래도 성원하는 팬들이 있다. 한마디 해 달라.
새해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란다. 격투기도 사랑해주시고 나도 사랑해달라.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반드시 격투기선수로 성장할 것이다. 레슬링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다. 기대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