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정치가 왜 스포츠에 뛰어드냐고…”

지난달 26일 AP통신은 "FIFA(국제축구연맹)가 최근 제기된 2018년 월드컵의 개최지 변경 또는 보이콧 주장에 대해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고 보도했다. 왜 이런 내용의 보도가 나왔는지는 국제 뉴스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다.

러시아는 지난달 18일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일어난 말레이시아 여객기 미사일 피격 추락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191명의 희생자가 나온 네덜란드 등에서는 러시아의 월드컵 개최를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FIFA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개탄한다"면서도 "스포츠 역사를 돌아봤을 때 보이콧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며 러시아를 두둔했다. FIFA는 한 발 더 나아가 “월드컵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건설적인 대화를 위한 강력한 촉매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듣기에 따라서는 억지스럽기도 한 주장을 폈다. FIFA는 지난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 반도를 편입했을 때도 러시아의 월드컵 개최를 재확인했다.

이 뉴스에서 눈길을 끄는 내용이 기사 맨 뒤에 있다. 비탈리 무코 러시아 체육부 장관이 미국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그때는 소련)도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으니 ‘네 탓’을 할 일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30여년 전, 스포츠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1980년 제 22회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미국과 미국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불참한 가운데 반쪽 대회로 치러졌다. 이전 대회에서도 아프리카 나라들이 인종차별 문제로 보이콧하는 등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모스크바 올림픽처럼 많은 나라가 불참하는 건 처음이었다.

1979년 1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친소 정권을 세웠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소련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며 여러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이었다. 1980년 2월 미국이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을 선언하자 서유럽을 중심으로 미국에 동조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도 4월 23일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을 결정했다.

올림픽 불참 결정의 불똥은 태릉선수촌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던 선수들에게 튀었다. 이때는 여자 핸드볼이 1979년 11월 아시아 예선을 4전 전승으로 통과한 데 이어 1980년 3월 콩고에서 열린 세계 예선에서 미국과 콩고를 꺾고 올림픽 본선 티켓을 획득한 뒤였다. 4년 뒤인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긴 했지만, 그 무렵 급성장하고 있던 여자 핸드볼은 좀 더 일찍 올림픽 메달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여자 핸드볼 뿐이었겠는가. 유도는 1976년 몬트리올 대회 63kg급에서 장은경이 재일동포가 아닌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달(은)을 따 금메달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모스크바 올림픽 이듬해인 1981년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 대회 71kg급에서 박종학은 한국 유도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땄다. 그런 가운데 하형주(95kg급) 등은 국가 대표로 뽑히고도 올림픽 매트에 서 보지 못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형주는 4년 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메치긴 했다.

스포츠 팬들의 관심에선 벗어나 있었지만 또 하나의 메달 유망 종목이 출전 기회를 놓쳤다. 양궁이었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자. 1979년 7월 19일 스포츠 팬들은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한국이 이런 종목에서도 세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인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김진호가 서베를린에서 벌어진 제 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30m·50m·60m·70m 그리고 단체전 등 전관왕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1년여 앞두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가 신데렐라처럼 나타났지만 ‘정치의 마법’에 걸린 신데렐라는 모스크바에 가지 못했다. 김진호는 4년 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했고 한국 양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영광은 여고생 서향순이 안았다.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과 관련해 별로 할 말이 없는 종목도 있다. 대표적으로 축구를 들 수 있다. 축구는 1980년 3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 2조에서 말레이시아에 예선에서 0-3, 결승에서 1-2로 져 본선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대열에 합류한 말레이시아 대신 출전한 이라크는 코스타리카를 3-0으로 누른데 이어 핀란드와 0-0, 강호 유고슬라비아와 1-1로 비겨 8강에 올랐다. 대회 준우승국인 동독에 0-4로 져 탈락했지만 나름대로 선전했다. 이 대회에서는 쿠웨이트도 나이지리아를 3-1로 꺾고 콜롬비아와 1-1, 체코슬로바키아와 0-0으로 비겨 조별 리그를 통과했다. 준우승국인 소련에 1-2로 져 4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쿠웨이트 역시 선전했다.

국내 스포츠 팬들에게 사실상 잊혀진 대회인 모스크바 올림픽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국 가운데 미국을 비롯해 한국과 서독, 일본 등 60개 나라 이상이 불참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참가국 가운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 덴마크, 스위스,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 서유럽 나라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오륜기를 달고 출전했다. 스웨덴과 핀란드, 오스트리아, 그리스 등은 국기를 앞세우고 참가했다.

미국과 서독 등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던 나라들이 불참해 대회 수준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세계신기록과 세계 타이 기록을 더해 39개, 올림픽 신기록이 95개나 수립돼 직전 대회인 몬트리올 올림픽의 세계신기록 40개, 올림픽 신기록 49개와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는 내용을 보였다. 이 대회에서는 소련과 동독의 메달 잔치가 벌어졌다. 종합 순위 1위인 소련이 금메달 80개와 은메달 69개, 동메달 46개, 2위인 동독이 금메달 47개와 은메달 37개, 동메달 42개로 두 나라가 321개의 메달을 휩쓸어 다른 나라들이 얻은 232개의 메달보다 훨씬 많았다. 불가리아, 쿠바, 이탈리아 등 5위 이내 나라들의 금메달 숫자는 10개 미만이었다.

이 대회 육상 남자 800m와 1500m에서는 당시 세계 육상 중거리를 양분하고 있던 영국의 세바스찬 코와 스티븐 오베트가 '세기의 대결'을 벌여 800m에서는 오베트가, 1500m에서는 코가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독의 마라토너 발데마르 치에르핀스키는 2시간11분03초로 골인해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 이어 2연속 우승했다. 올림픽 마라톤 2연속 우승은 아베베 비킬라(에티오피아)의 1960년 로마 대회와 1964년 도쿄 대회 우승에 이어 두 번째였다. 북한은 우방국에서 벌어진 대회였지만 금메달을 따지 못한 가운데 레슬링 자유형 라이트플라이급의 장세홍, 밴텀급의 이호평, 역도 플라이급의 호봉철이 은메달을 획득했고 복싱 라이트플라이급의 이병욱과 역도 플라이급의 한경시가 동메달을 기록했다.

한국은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국제 회의에 대표단을 보냈고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국제 심판의 참가는 허용했다. 대회 기간 열린 NOC(국가올림픽위원회) 회의에는 조상호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7명의 대표단이, IOC 총회에는 김택수 위원 등 2명의 대표단이 참가했다.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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