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선수도 울고, 팬도 울고.'
98분. 정규시간을 훌쩍 넘긴 경기 막판, 광주FC 바루아가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그가 때린 슈팅이 바깥쪽 그물을 흔들자 11일 광주월드컵경기장을 물들인 노란 유니폼의 물결이 일제히 들썩였다. 비록 골은 아니었지만, 한 점 차 리드를 지켜내야 하는 팬들에게는 그마저도 긴장과 환희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기다리던 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라운드와 관중석은 이내 숨죽인 눈물바다로 변했다. 선수들은 피치 위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고, 팬들은 두 손으로 눈가를 연신 문지르며 차오르는 감격을 달랬다. 흥에 겨워 춤사위를 펼쳐내는 이들과 두 발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이들까지, 그곳의 모든 숨결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무려 28경기 연속 무승. 200여 일이 넘는 7개월이란 아득한 잔혹사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팬들의 마음은 바짝 타들어 갔다. 안쓰러움과 애틋함, 때로는 서운함과 무거운 푸념이 계절을 따라 교차했다. 경기 막판 집중력 저하와 승점 관리 실패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지만, 팬들은 단 한 번도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을 놓지 않았다.
이날 리그 2위 울산을 상대로 경기장을 찾은 6,700여 명의 팬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관전이 아니었다. 28경기 무승의 긴 시간에도 팀을 떠나지 않은 동행이었다. 관중석 한편에 조용히 내걸린 배너는 이들의 깊은 진심을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었다.
"우리는 너희들이 귀하다."
"1분 1초라도 소중하고 간절하게. 단 1%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모든 걸 걸어라."
배너에 담긴 문구는 오랜 무승의 터널을 지나온 선수단과 팬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경기장을 찾은 이들은 물론, 스탠드 난간을 넘어 시청자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뭉클한 파동을 일으켰다. 스포츠가 단지 스코어보드의 숫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詩)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 반전의 배경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뿐 아니라 팀의 중심을 지킨 국내 베테랑과 유스 출신 선수들의 역할도 있었다. 신창무를 비롯해 중원에서 경험과 노련함을 보탠 주세종·최경록, 유스 출신 문민서 등은 어려운 시기에도 팀이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보탰다. 자칫 팀 분위기가 바닥을 칠 수 있었던 위기 속에서도 "할 수 있다"라며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라운드 안팎에서 동료들을 끌어안은 베테랑들의 헌신은 긴 무승의 시간을 버텨내는 밑거름이 됐다.
지난 여름 합류한 코트디브아르 출신 바 루아의 공격력이 살아나고 부상으로 오래 자리를 비웠던 반 흐룬스벤이 복귀하면서 광주는 공수 양면에서 힘을 얻었다. 앞선 14경기에서 1도움에 그쳤던 바루아는 동료들의 헌신적인 지원 속에 울산전 2골 2도움 원맨쇼로 공격의 혈을 뚫어냈고, 두 달 만에 돌아온 반 흐룬스벤도 수비진에 안정감을 더하며 한 점 차 리드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탰다.
경기 후 이정규 감독의 소회에서도 긴 무승의 시간에 대한 부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기면 조금 다른 인터뷰를 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팬분들께 죄송한 마음뿐"이라는 말에는 승리의 기쁨보다 팬들을 향한 미안함이 먼저 담겼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팀의 중심을 잡아준 고참 선수들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승리가 따르지 않아 복잡하고 괴로웠던 밤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목적이 확고한 공격 축구로 보답하겠다는 약속은 비로소 팬들의 마음속에 단단한 신뢰로 뿌리내렸다.
비록 광주는 여전히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 있지만, 이날 광주가 피치 위에 쓴 서사는 ‘왜 우리가 여전히 이 공놀이에 마음을 빼앗기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답을 보여준다.
숱한 좌절의 시간 속에서도 서로를 참아내고 품어준 선수와 서포터즈의 긴 인내, 그리고 끝내 꺾이지 않은 마음. 28경기 만에 찾아온 승리의 기쁨은 광주가 다시 나아갈 힘이자, 스포츠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낭만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아직 1%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광주는 승강전이라는 현실에 대비하면서도 최하위 탈출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공격 축구로 남은 경기에도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28경기 무승의 터널을 빠져나온 광주가 팬들에게 보여줘야 할 다음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