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옛 병법서 '손자병법(孫子兵法)' 구지(九地) 편에는 '상산유사(常山之蛇)'의 비유가 나온다. 상산에 사는 신령스러운 뱀 솔연(率然)은 머리를 치면 꼬리가 덤벼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덮치며,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덤벼든다. 수십 명이 한 덩어리로 호흡하는 군대와 스포츠 조직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 바로 '동시적 유기성'을 이르는 말이다. 머리와 꼬리, 허리가 따로 놀며 각자도생하는 군대는 필패를 면치 못한다.
2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베네수엘라의 A매치 평가전이 정확히 그러했다. 결과는 0-0 무승부였으나, 경기 내용은 완패보다 참담한 졸전이었다. 특히 후반 교체돼 벤치로 물러나던 핵심 수비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가 축구화를 그라운드 바닥에 거칠게 내던지며 뿜어낸 분노는 이날 대표팀의 총체적 난국을 상징적으로 웅변했다
평소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대표팀 수비의 중심이 보인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경기가 끝난 뒤 그의 말을 들으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반전이 필요한 경기였는데 그렇지 못했다. 수비 선수들이 솔직히 불쌍하다. 선수들이 전부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오늘 경기라면 7-0, 8-0으로 이겼어도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 같다."
0-0 무승부보다 더 아픈 말이었다. 로베르트 모레노 감독은 전날 베네수엘라전을 앞두고 "전원 수비와 전원 공격"을 대표팀의 정체성으로 강조했다. 공격수 오현규조차 수비 상황에서는 ‘첫 번째 수비수’가 돼야 한다고 했다. 우루과이전 1-4 패배에 대해서도 개인의 실수보다 팀의 실수가 많았다며 보완책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4시간 뒤 그라운드에서 나타난 모습은 그 말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선수들은 함께 움직이지 못했다. 수비수가 공을 잡으면 미드필더와 공격진이 동시에 공간을 만들며 패스 길을 열어줘야 한다. 중원이 전진하면 공격수는 상대 수비를 끌고 움직여 공간을 만들고, 풀백은 적절한 타이밍에 측면을 파고들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 축구가 말하는 ‘연결’이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전에서는 공을 가진 선수와 갖지 않은 선수 사이의 연결고리가 자주 끊겼다. 김민재가 후방에서 볼을 잡고 전진하는 장면이 반복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세계 정상급 센터백이 공격의 첫 번째 패스를 담당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센터백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직접 공을 몰고 상대 진영까지 올라가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전술적 선택이라기보다 탈출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숫자도 냉정하다. 한국은 이날 90분 동안 볼 점유율에서는 51%-49%로 앞섰지만 슈팅에서는 7-12, 유효슈팅에서도 3-4로 밀렸다. 특히 상대 페널티박스 안 터치가 7회에 불과한 반면 베네수엘라는 21회였다. 파울 역시 한국이 24개로 상대의 14개보다 10개 많았다.
점유율 51%라는 숫자가 경기 주도권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채 후방에서 공을 돌려 확보한 점유율은 위협적이지 않다. 축구에서 중요한 것은 공을 얼마나 오래 갖느냐보다 어디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갖느냐다.
전반전은 더 심각했다. 45분 동안 한국은 단 한 차례 슈팅에 그쳤고 볼 점유율에서도 43%-57%로 밀렸다. FIFA 랭킹 32위 한국이 48위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공격의 실마리조차 제대로 찾지 못했다.
모레노 감독은 우루과이전과 비교해 선발 5명을 바꿨다. 몸 상태를 조절해온 황인범이 처음 출전했고 김민수도 A매치 세 번째 경기 만에 선발 기회를 얻었다. 송범근과 조현택 등에도 변화를 줬다. 선발 명단만 보면 1-4 참패 뒤 새로운 해법을 찾으려는 의도가 읽혔다. 황인범의 복귀는 특히 중원에서 패스의 방향과 속도를 바꿔줄 카드로 기대됐다.
그러나 선수는 바뀌었는데 축구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모레노호 세 번째 경기의 가장 큰 문제가 있다. 4-4-2전형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알렉스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4-4-2를 세계 정상의 전술로 만들었고, 디에고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시 오랫동안 이 전형을 활용했다. 포메이션은 지도 위에 찍는 점일 뿐이다. 그 점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서로 연결되는지가 축구다.
4-4-2의 생명은 간격과 연동이다. 두 줄이 촘촘히 움직이면 강력하지만 한쪽이 움직이고 다른 쪽이 멈추는 순간 중앙과 측면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두 명뿐인 중앙 미드필더가 압박과 빌드업을 동시에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측면과 투톱의 지원이 늦으면 중원은 고립된다.
베네수엘라는 바로 그 공간을 파고들었다. 반대로 한국은 손흥민과 오현규라는 결정력 있는 공격수 두 명을 세워놓고도 제대로 된 탄환을 공급하지 못했다. 이강인 역시 공을 잡았을 때 선택지가 적어 볼을 오래 소유하는 장면이 늘었다. 개인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본질은 구조였다.
축구에는 ‘공은 사람보다 빠르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드리블러라도 패스보다 빠를 수 없다. 그런데 패스를 받을 동료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공을 가진 선수에게 남는 선택은 많지 않다. 드리블하거나, 뒤로 돌리거나, 무리한 패스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90분이 그랬다. 결국 이날 가장 주목해야 할 장면은 손흥민의 59호골 도전 실패도, 0-0이라는 스코어도 아니었다. 김민재의 축구화였다. 김민재는 수비수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공을 들고 올라갔다. 후방에서부터 막힌 공격의 혈을 뚫어보려 했다. 그러나 혼자 움직여서는 축구가 될 수 없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경기다. 한 명이 10m 움직이면 다른 선수가 그에 맞춰 5m를 움직여야 하고, 누군가 공간을 비우면 다른 누군가는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좋은 팀을 평가할 때는 공을 가진 선수보다 공을 갖지 않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라고 한다.
김민재가 "선수들이 전부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더 뼈아픈 것은 이번 경기가 모레노호의 첫 경기가 아니라 세 번째였다는 사실이다. 첫 경기 에콰도르전은 3-0 승리였다. 두 번째 우루과이전은 1-4 패배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베네수엘라와 0-0. 성적은 1승1무1패다. 대한축구협회가 모레노 감독에게 맡긴 9~11월 6경기의 절반이 지났다.
문제는 승점표가 아니다. 세 경기쯤 치렀다면 최소한 ‘모레노의 한국은 이런 축구를 한다’고 설명할 한 문장이 나타나야 한다. 강한 압박인가. 빠른 전환인가. 후방 빌드업인가. 점유율 축구인가. 투톱을 활용한 직선적인 공격인가.
아직 선명한 답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에콰도르전 3-0 승리가 한국의 변화였는지, 상대의 후반 집중력 저하에서 얻은 결과였는지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상황이 됐다. 우루과이전에서 강한 압박을 만나 무너진 약점은 베네수엘라전에서도 충분히 수정되지 않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되짚어 새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패배 역시 축구에서는 훌륭한 교과서다. 우루과이전 1-4 패배가 의미 있으려면 그 경기에서 얻은 교훈이 다음 경기에서 보여야 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전에서는 답안보다 같은 문제가 다시 보였다. 김민재의 축구화가 날아간 이유도 바로 그것 아닐까. 한 경기 비겨서가 아니다. 자신들은 뛰고 있는데 팀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답답함. 11명이 그라운드에 있지만 11명이 하나의 팀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허탈함이었을 것이다.
한국은 6일 용인에서 우즈베키스탄과 모레노 체제 네 번째 경기를 치른다. 이제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선수 교체가 아니다. 11명이 함께 움직이는 축구다. 전원 공격·전원 수비라는 말도 기자회견장의 구호가 아니라 그라운드의 움직임으로 증명돼야 한다. 모레노 감독에게 남은 세 경기는 그래서 승패만의 시험이 아니다.
한국 축구에 자신의 색깔을 입힐 수 있는 감독인지 보여줘야 하는 시험이다. 그리고 김민재가 다음 경기에서는 축구화를 집어던지는 대신 동료들과 웃으며 그라운드를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 장면이 나온다면 비로소 모레노호는 출발선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