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이제 한 경기만 남았다. 한국인 김상식(49) 감독이 베트남 축구 역사에 아무도 밟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열어젖힐 기회를 잡았다.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22일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6 아세안 현대컵 결승 1차전에서 '동남아 최강'이자 최대 라이벌 태국을 2-0으로 완파했다. '김상식 매직'을 앞세운 베트남은 26일 오후 10시(한국시간) 하노이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리는 홈 2차전에서 1골 차로 져도 정상에 오른다.
우승할 경우 베트남 축구 사상 최초의 아세안 챔피언십 2연패다. 베트남은 2008년과 2018년, 2024년 세 차례 정상에 올랐지만 한 번도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지 못했다. 2022년 결승에서는 태국에 밀렸지만 2024년 김상식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태국을 꺾어 정상에 복귀했고, 이번에는 처음으로 연속 우승을 노린다. 아세안 현대컵(ASEAN Hyundai Cup)은 동남아시아 국가대표팀의 ‘지역 월드컵’이다. 아세안축구연맹(AFF)이 주관하는 동남아 최고 권위의 남자 국가대표 대회로, 1996년 시작됐다. 올해 2026년 대회는 창설 30주년이자 16번째 대회다.
◆버티고, 바꾸고, 찔렀다…김상식의 '후반 승부수'
1차전은 '김상식 축구'의 특색이 그대로 드러난 경기였다.
전반에는 태국의 공세가 거셌다. 홈 이점을 등에 업은 태국은 베트남의 측면 공격을 차단한 뒤 공격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전반 막판 연속해서 결정적 슈팅 기회를 만들었지만 베트남 골키퍼 파트릭 레 지앙이 버텨냈다. 레 지앙은 결국 이날 공식 경기 최우수선수(POTM)로 선정됐다.
승부의 추는 후반 김 감독의 교체 카드와 함께 급격히 기울었다.
김 감독은 후반 10분을 넘기면서 응우옌 꽝 하이와 응우옌 하이 롱을 투입하며 공격의 속도와 창의성을 높였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후반 17분 응우옌 딘 박이 수비수와 경합하며 받아낸 공을 절묘한 백힐로 내줬고, 쇄도하던 하이 롱이 왼발로 골문 구석을 갈랐다.
불과 7분 뒤에는 꽝 하이가 해결사로 나섰다. 도 호앙 헨이 오른쪽에서 올려준 크로스를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해 태국 골망을 흔들었다. 교체 투입된 두 선수가 7분 사이 두 골을 합작한 것이다.
우연이라기보다 김 감독의 대회 운영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지난 말레이시아와 준결승 2차전에서도 후반 투입한 응우옌 쑤언 손이 승부를 바꾸며 두 골을 터뜨렸다. 선발 11명만으로 경기를 풀기보다 상대의 체력이 떨어지고 공간이 벌어지는 후반에 공격 카드를 집중시키는 '게임 체인저 전략'이 연달아 적중하고 있다.
◆2차전 최대 적은 '2-0의 여유'
그러나 아직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은 아니다.
2차전에서 태국은 선택지가 많지 않다. 최소 두 골을 만회해야 하는 만큼 경기 시작부터 강한 전방 압박과 공격적인 운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베트남은 굳이 맞불을 놓을 필요가 없다. 수비 블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딘 박, 꽝 하이 등 빠른 공격수들을 활용해 태국 수비 뒷공간을 노리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이다.
관건은 '지키려다 스스로 내려앉는 함정'을 피하는 것이다. 2-0이라는 점수만 의식해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나설 경우 태국에 지속적인 슈팅과 세트피스를 허용할 수 있다. 오히려 한 골을 먼저 넣으면 태국은 사실상 네 골이 필요해진다. 김 감독이 방콕에서 보여준 실리 축구를 하노이에서도 얼마나 냉정하게 구현하느냐가 마지막 승부의 열쇠다.
◆'박항서 매직' 이후 다시 등장한 한국인 지도자의 힘
김상식 감독이 만들어내는 기록도 예사롭지 않다.
베트남은 이번 승리로 최근 A매치 25경기 연속 무패(22승3무) 행진을 이어갔다. 종전 베트남 대표팀의 장기 무패 기록을 넘어선 새로운 역사다. 이미 2024년 아세안 정상에 올랐던 김 감독이 다시 우승컵을 들면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아세안 챔피언십 2연패를 이끈 감독이 된다.
베트남 축구에서 한국인 지도자가 갖는 의미도 다시 주목받는다. 박항서 감독이 자신감과 조직력을 끌어올리며 베트남 축구의 눈높이를 바꿨다면, 김상식 감독은 그 상승한 눈높이를 '지속 가능한 승리'로 연결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김 감독의 축구는 화려함보다 결과에 가깝다. 상대와 경기 흐름에 따라 선발을 바꾸고, 승부처까지 기다렸다가 교체 카드로 균형을 무너뜨린다. 준결승과 결승에서 잇따라 적중한 후반 승부수가 대표적이다.
결승을 앞두고 김 감독은 "지난 대회에서 우승했고 다시 결승에 왔다. 베트남 축구의 역사이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 그 역사는 26일 하노이에서 완성될 수 있다.
'박항서 매직'이 베트남 축구에 새로운 꿈을 심었다면, '김상식 매직'은 그 꿈을 일회성이 아닌 우승의 습관으로 바꾸고 있다. 방콕에서 확보한 두 골의 여유를 지켜내면 김상식과 베트남은 사상 최초의 아세안 챔피언십 2연패라는 새로운 페이지를 함께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