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전멸'의 착시, 한국 축구의 유럽 진출은 체질 개선 중이다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이한범·황인범·이강인이 보여준 변화, 유럽파 기준 '진출'에서 '입지'로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까지… 한국 선수들의 질적 성장

벨기에 주피터리그 클럽 브뤼헤로 이적한 이한범이 8일 코르트레이크와의 리그 데뷔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경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클럽 브뤼헤 구단 인스타그램 캠처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벨기에 브뤼헤의 현지 팬들과 축구계가 한국인 수비수 한 명에게 단단히 매료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2026 북중미 월드컵 이후 덴마크 미트윌란을 떠나 클럽 브뤼헤로 이적한 이한범이다. 8일(한국시간) 열린 주필러리그 2026-2027시즌 코르트레이크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강렬한 데뷔전을 치르며 벨기에 축구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전반 4분에는 골키퍼까지 제친 상대 공격수의 결정적 슈팅을 몸을 던진 태클로 막아냈고, 21분에도 박스 정면에서 날아온 중거리 슛을 차단해 실점 위기를 막아냈다. 후반에는 중원에서 다시 한번 슬라이딩 태클로 공격의 맥을 끊었고, 이 수비를 기점으로 팀의 추가골이 나왔다. 제공권과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숫자도 압도적이었다. 146차례 터치, 패스 성공률 95%, 지상·공중 경합 성공률 모두 80%. 풋몹 평점 8.6으로 양 팀 최고였고, 경기 공식 MOM까지 가져갔다.

팬들의 반응은 더욱 뜨겁다. SNS를 통해 "브뤼헤가 새로운 벽을 찾았다", "그는 진짜 야수이자 괴물이다"라며 극찬이 쏟아졌다. 브뤼헤는 안더레흐트에 이어 벨기에 최다 우승을 자랑하며 UEFA 클럽 랭킹 19위에 올라 있는 명문이다. 빅리그 직행 대신 단계적 성장을 택한 이한범의 선택이 성공적인 첫발을 뗀 셈이다.

클럽 브뤼헤 한국인 수비수 이한범이 8일 주필러리그 2026~2027시즌 개막전에서 데뷔전을 치르고 있다./ 클럽 브뤼헤 구단 인스타그램 캡처

◆ 리그 간판보다는 입지가 중요

손흥민이 미국(MLS) 무대로 떠나며 프리미어리그(EPL) 중계창에서 한국 선수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워졌을 때, 일각에서는 "한국 축구의 유럽파 위기론" 혹은 "EPL 전멸"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한때 박지성·이영표, 손흥민·기성용·이청용, 혹은 손흥민·황희찬 등이 동시에 EPL을 누비던 시절과 비교하면 외견상 서글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숫자가 주는 착시를 한 껍질만 벗겨보면, 지금 유럽 대륙 전역에서 펼쳐지는 한국 축구의 스펙트럼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단단해졌다.

단순히 EPL이라는 거대한 상징성에 매몰될 이유가 없다. 리그의 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떤 입지와 영향력으로 뛰고 있느냐'다. 최근 잇따라 전해진 해외파 선수들의 낭보는 한국 축구의 유럽 진출이 단순한 숫자 늘리기를 넘어 질적인 변화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 유럽파 수비수의 확산, 한국 축구의 오래된 약점이 달라지고 있다

가장 반가운 변화는 오랫동안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꼽혔던 유럽파 수비수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민재가 유럽 정상급 무대에서 먼저 길을 닦았다면, 이제는 이한범과 김지수를 비롯한 새로운 수비 자원들이 유럽 무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 길을 넓혀가고 있다.

공격진에서도 새로운 세대의 유럽 도전이 속도를 내고 있다. 포항을 떠나 독일 다름슈타트로 향한 이호재는 9일 홀슈타인 킬과의 2026~2027 분데스리가 2부 개막전에서 0-2로 끌려가던 후반 15분 교체 투입되어 극적인 추격 골을 터뜨리며 팀의 2-2 무승부와 값진 승점 1점을 견인했다. 프랑스 올랭피크 리옹 이적설로 주목받는 스토크시티의 배준호 역시 8일 올덤 애슬레틱과의 EFL컵 1라운드에서 후반 교체 투입 16분 만에 상대 수비 라인을 가르는 송곳 같은 전진 패스로 2-0 쐐기골을 도왔다.

빅리그라는 간판 아래 벤치를 지키는 것보다, 유럽의 경쟁력 있는 리그에서 매주 경기를 뛰며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것이 대표팀에는 더 값진 자산이 될 수 있다.

FC 포르투 황인범(가운데)이 지난 2일 SCU토레엔세(2부)와 치른 포르투갈 슈퍼컵에 교체 투입돼 그라운드를 밟고 있다./ 황인범 인스타그램 캡처

◆ 황인범의 포르투행, 한국 미드필더의 달라진 위상

중원에서의 상징적 도약 역시 눈부시다.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를 거쳐 포르투갈 최고 명문 FC 포르투의 유니폼을 입은 황인범은 입단 12일 만에 열린 슈퍼컵 데뷔전에서 교체 투입 후 정교한 경기 운영과 위협적인 슈팅을 선보이며 곧바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챔피언스리그 단골인 포르투갈 명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황인범의 행보는, 한국 미드필더 역시 유럽 명문 구단에서 단순한 조연이 아닌 전력의 한 축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2026 쿠팡플레이 시리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가운데 이강인이 감독의 지시를 받고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박헌우 기자

◆ 이강인과 아틀레티고, 한국 축구가 도달한 '질적 최고점'

무엇보다 이번 이적시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상징성을 갖는 인물은 이강인이다.

4000만 유로에 가까운 이적료와 등번호 7번을 받은 이강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행은 이번 여름 한국 축구가 만들어낸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한국 축구의 유럽 진출이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박지성과 손흥민 이후 또 하나의 질적 도약을 만들어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라리가 최고 명문 중 하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한국인 공격수를 핵심 자원으로 점찍고 영입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파격적이다.

이강인은 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AT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2026 쿠팡플레이 시리즈 친선경기를 통해 데뷔전을 치렀다. 이적 당시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좌우 측면 미드필더로 기용될 거라는 예상이 따랐고, 실제 이날 최전방 투톱 공격수로 경기를 뛰며 동료들과 처음으로 손발을 맞췄다.

'EPL 진출자 수'라는 단순 수치보다, 유럽 최정상급 빅클럽에서 상징적인 등번호를 받고 핵심 자원으로 기대받는 이강인의 존재감은 한국 축구의 글로벌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이는 단순히 유럽에 '나간' 선수가 아니라, 유럽의 '중심을 흔들 수 있는' 선수를 보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스토크시티 배준호(왼쪽)가 지난 2월 열린 잉글랜드 챔피언십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전에서 상대 유누스 코낙과 볼을 다투고 있다. /스토크(잉글랜드)=AP 뉴시스

◆ '진짜 경쟁력'을 증명할 유망주들의 활력

유럽파를 평가하는 기준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 어느 리그에 몇 명이 있느냐보다 어떤 팀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EPL이라는 간판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한국 축구의 유럽 경쟁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라리가 지로나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김민수를 비롯해 배준호(스토크시티), 양현준(셀틱), 오현규(베식타스), 엄지성(스완지시티) 등은 유럽 무대에서 실전 경험을 쌓으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 양민혁(토트넘)과 박승수(뉴캐슬)처럼 일찌감치 빅리그, 빅클럽에 진입한 유망주들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놓여 있다. 소속팀의 이름값에 머무르지 않고 꾸준한 출전 기회를 확보하고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일이다.

EPL에 한국 선수가 없다고 해서 한국 축구의 유럽 도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중요한 변화는 숫자가 아니라 선수들의 위치다. 유럽 각국의 경쟁력 있는 리그와 명문 구단에서 매주 뛰고, 자신의 입지를 넓히며, 다음 단계로 올라설 발판을 만드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EPL이라는 간판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유럽 전역으로 넓어진 새로운 지도가 펼쳐지고 있다. 한국 축구의 유럽 도전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숫자'에서 '질'로 체질을 바꾸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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