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위대한 팀이 위대한 선수를 이겼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 최고의 주인공은 단연 시스템 축구로 무장한 ‘무적함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음바페를 필두로 한 강력한 화력의 프랑스,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가 버티는 아르헨티나를 차례로 피치 위에서 완전 무력화하며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A매치 38경기 연속 무패라는 대기록이 증명하듯, 이번 월드컵 전체를 관통하는 명언은 스페인 우승이 확정된 뒤 가까운 지인이 내뱉은 바로 저 한마디였다.
스페인에는 라민 야말이라는 최고의 신성이 존재했지만, 야말조차 스페인이라는 촘촘한 시스템의 일원일 뿐이었다. 아르헨티나가 ‘메시의 팀’이라 불린 것과 달리, 스페인은 ‘야말의 팀’이 아니었다. 로드리, 페드리, 쿠바르시, 다니 올모 등 화려한 스타들이 즐비하지만, 누구 하나 독보적으로 튀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약속된 위치에서 규율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단단한 인내와 확률을 기반으로 상대의 장점을 완벽히 봉쇄하는 ‘티키타가 2.0’은 이제 사실상 궁극에 가까운 전술적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입증했다.
다만, 이 완벽한 시스템 축구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상대를 완벽히 통제하고 압도하는 확률 축구는 역설적으로 축구 특유의 박진감과 예측 불가능한 낭만을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보여준 크랙(Crack)들의 폭발적인 직진성과 개개인의 천재성이 만들어내는 피치 위에서의 흥분과 열정이 축구 본연의 묘미라면, 스페인의 축구는 철저히 계산된 기계 장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냉정한 확률 축구가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사실은 현대 축구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 위대한 팀을 만드는 일본
스페인의 우승을 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일본 축구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시아의 동반 몰락 속에서도, 이번 대회 일본이 보여준 경쟁력은 독보적이었다. 비록 남미의 전통 강호 브라질의 벽에 막혀 32강에서 도전을 멈추긴 했으나, 에이스 미토마(브라이튼), 미나미노(AS 모나코), 엔도(리버풀), 구보(레알 소시에다드) 등 핵심 선수들이 줄부상으로 결장했음에도 그들의 공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 경기 흔들림 없는 경기력을 보여준 것은 그들의 시스템이 이미 완성 단계에 진입했음을 입증한다.
조별리그에서 우승 후보로 분류되던 네덜란드와 비기는 등 1승 2무 무패로 통과하고, 32강에서 '삼바군단' 브라질에 경기 막판 결승골을 내주며 1-2로 아쉽게 역전패했지만, 전반 선제골을 터뜨리는 등 전혀 물러서지 않는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대진운만 따랐다면 이번 대회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일본의 힘은 스페인과 닮은 ‘시스템 축구’에서 나왔다. 비록 이번 월드컵에서는 다소 이른 시기에 멈췄지만, 머지않아 세계 정상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며 일본은 스스로 ‘위대한 팀’이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 위대한 선수만 기다리는 한국
반면, 홍명보 감독이 이끈 한국 축구의 현실은 서글픔 그 자체였다. 시스템은커녕 기본 전술조차 없이 핵심 선수들의 개인 기량에만 의존하는 무능한 축구가 되풀이되었다. 오히려 지도부의 실체 없는 전술 강요 속에 역대 최악에 가까운 조별리그 참패를 당하며, 한국 축구의 소중한 4년은 허무하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특히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이재성 등 역대 최고라 불릴 만한 스쿼드를 갖추고 최상의 대진운과 일정까지 더해졌음에도, 단 한 경기 시원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원통하고 뼈아프다. 최약체 남아공을 상대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최전방에 손흥민 한 명만 고립시킨 채 9명이 수비에 급급한 이해할 수 없는 운용은 '이게 과연 국가대표팀의 축구인가'라는 깊은 회의감을 남겼다.
그러나 이 비극을 단지 홍명보 감독 한 사람의 무능과 독단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한국 축구의 거버넌스인 축구협회(KFA)에 있다. KFA는 장기적인 축구 철학과 시스템을 설계해 보급하기보다, 과거부터 그래왔듯 손흥민, 이강인 같은 ‘위대한 선수’가 로또처럼 탄생하기만을 기다리는 천편일률적 행정을 반복해 왔다.
물론 한국 스포츠 특유의 '영웅적 개성과 패기'는 일본에는 없는 우리만의 위대한 자산이자 축구의 낭만 그 자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크랙과 '위대한 선수'가 존재한다 해도, 이를 받쳐줄 단단한 '기본 시스템'이 부재하다면 그 개인의 천재성은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시스템이라는 튼튼한 토대 위에 '위대한 선수'의 영감과 폭발력이 더해질 때 비로소 세계를 놀라게 할 진짜 경쟁력이 완성되는 법이다.
‘위대한 팀’의 시스템을 정립해 나가는 일본, 그리고 오직 ‘위대한 선수’의 우연한 출현에만 운명을 거는 한국.
이 패러다임의 격차가 오늘날 한일 축구의 수준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적 원인이다. 뼈대(시스템)를 갖추지 못한 한국 축구의 미래는 일본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질 것이 자명하다. 이번 월드컵 참사를 계기로 한국 축구가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근본적 환골탈태를 이뤄낼 수 있을지, 아니면 대책 없는 영웅주의에 갇혀 도태될지, 그 성패의 갈림길이 바로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