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월드컵은 승자보다 패자를 더 냉정하게 기억하는 무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보여준 결과는 많은 국민에게 아쉬움과 허탈함을 안겼다.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비난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책임'이라고 생각해 왔다. 진정한 책임은 임명직이든 선출직이든 외부의 압력이나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판단이 조직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스스로 인정하고, 조직의 미래를 위해 먼저 결단하는 용기다.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사태를 오래 끌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조직이 더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길을 열어준다. 임명권자 역시 결과에 대한 경위를 국민과 구성원에게 성실히 설명하고, 후속 조치를 책임 있게 추진해야 한다. 그것이 신뢰를 지키는 조직의 기본 원칙이다.
축구는 치열한 경쟁의 세계다. 승리하면 박수를 받고, 실패하면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경쟁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존중이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한 사람의 인격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실패한 사람도 존엄을 가진 인간이며, 조직은 마지막까지 품격 있는 태도로 구성원을 대해야 한다.
물론 존중이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충분한 배려와 존중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외면하거나 조직의 질서를 훼손한다면 원칙에 따라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존중과 원칙은 서로 반대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가치다. 존중 없는 원칙은 냉혹한 처벌이 되고, 원칙 없는 존중은 조직을 무너뜨리는 방관이 된다.
이번 대표팀 혼란 역시 단순한 경기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감독 선임 과정에서 제기된 거버넌스 논란과 의사결정의 투명성 부족은 많은 축구팬의 신뢰를 흔들었다. 현대 스포츠에서 실력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 있지만,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성적 이전에 신뢰다.
모든 CEO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부여받는다. 판단의 기준은 도덕성과 윤리성이다. 도덕적 문제는 사과와 책임, 용서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문제는 조직의 공정성과 신뢰를 무너뜨리는 근본적인 문제다. 축구협회 역시 이러한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대한축구협회는 환골탈태해야 한다. 단순히 사람 몇 명을 교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운영 철학과 시스템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공정한 거버넌스, 투명한 의사결정, 전문성을 갖춘 인재 등용, 현장과 행정의 긴밀한 소통이 뿌리내려야 한다. 미래와 공정, 존중과 명예가 조직 운영의 중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한국 축구는 100년을 바라보는 장기 비전도 필요하다. 그것이 부담스럽다면 25년 단위의 네 단계 발전 계획이라도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월드컵이 끝날 때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방식으로는 세계 축구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지속성과 일관성이 경쟁력을 만든다.
무엇보다 축구인은 국민의 신뢰 위에 존재한다. 오랫동안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해 온 지도자와 선수들, 그리고 언제나 대표팀을 응원해 준 축구팬과 국민 여러분께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실망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 감정이 한국 축구를 향한 사랑까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2002년의 영광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의 준비와 신뢰, 그리고 구성원 모두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번 실패 또한 더 강한 한국 축구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위기는 언젠가 지나간다. 그러나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바꾸느냐는 오래 남는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 서로를 존중하는 품격, 미래를 준비하는 시스템이 함께할 때 한국 축구는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