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의 월드컵 파일] 남아공전 충격패, 공간·숫자·시간 잊은 축구에 미래는 없다


2026 북중미월드컵 3차전 부진을 잊고, 빠른 회복을 바라며
원칙·기본·의지, 지금 한국축구에 가장 필요한 세 가지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최종전 대한민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경기가 25일(한국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에스타디오 BBVA에서 진행된 가운데 손흥민(가운데)과 선수들이 0-1로 패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몬테레이=AP.뉴시스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남아공에 0-1로 패한 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축구는 결과의 스포츠다. 승리하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패배하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도자와 행정가, 그리고 축구인으로 살아온 나는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 왔다. 지금 한국축구에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비난도, 성급한 책임론도 아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남아공전 패배는 단순히 한 경기의 실패가 아니다. 조 2위 진출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에서 보여준 무기력한 경기력은 한국축구가 오랫동안 안고 있는 과제를 다시 드러냈다. 위기 상황에서 흔들렸고, 경기의 흐름을 스스로 바꾸지 못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 있게 판단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 문제를 세 가지 단어로 설명하고 싶다. 원칙, 기본, 그리고 의지다.

원칙(原則) – 흔들리지 않는 리더의 기준

리더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특히 리스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흔들리는 리더는 원칙보다 여론에 기대어 판단하게 되고, 결국 조직은 방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리더의 역할은 어렵고 무거운 책임을 요구한다.

한국에는 '도 아니면 모'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을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책임 있는 결단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결과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분명한 철학을 갖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진정한 리더는 인기보다 원칙을, 순간의 평가보다 미래의 가치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대표팀 역시 마찬가지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럴수록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가져야 한다. 선수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뛰고 어떤 축구를 해야 하는지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구성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리더의 모습 또한 결국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책임감 있는 결단력이다.

기본(基本) – 축구를 이해하는 세 가지 요소

모든 경쟁에는 반드시 상대가 존재한다. 따라서 승리를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며, 적소와 적시에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선수 시절부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개념은 '공간, 숫자, 시간'이다. 공간을 이해해야 움직임이 보이고, 숫자를 이해해야 우위를 만들 수 있으며, 시간을 이해해야 경기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

이번 남아공전에서도 우리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상대가 비워 둔 공간을 찾지 못했고, 수적 우위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경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 템포를 조절하거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결국 공은 소유했지만 경기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선수 시절에도 늘 이 세 가지를 생각하며 뛰었고, 지도자가 된 뒤에도 선수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했다. 처음에는 어려워했지만 결국 경기 이해력과 판단력을 높이는 핵심 요소가 됐다. 축구는 단순히 기술과 체력만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얼마나 잘 생각하며 경기하느냐가 승패를 결정한다.

의지(意志) – 한국축구가 넘어야 할 과제

나는 오래전부터 한국축구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로 선수 스스로 판단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꼽아 왔다.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의 길을 걸으며 느낀 점은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한 것은 성인이 되어 쉽게 익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때 대한축구협회는 어린 선수들에게 과도한 코칭을 제한하는 규정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창의성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였다. 비록 여러 이유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만큼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규정이 아니다. 지도자의 의식이다. 어린 선수들이 실수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책임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역할이다. 지시만 따르는 선수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선수를 길러야 한다.

남아공전 패배는 아프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배움의 기회를 함께 준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본(本)에 힘쓰고 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는 말처럼, 한국축구도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칙 있는 리더십, 축구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는 의지. 이 세 가지가 바로 한국축구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반드시 되새겨야 할 가치다.

32강 진출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축구의 미래는 결국 이 세 가지를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이 내가 이번 남아공전 패배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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