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는 90분간 수많은 판단과 선택이 교차하는 ‘찰나의 스포츠’다. 그중에서도 골키퍼와 중앙 수비수가 마주하는 페널티 에어리어는 단 한 번의 사소한 엇박자가 치명적인 실점으로 직결되는 가장 잔인한 전장이다. 19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2차전에서 홍명보호가 당한 0-1 석패가 딱 그랬다. 후반 5분, 공중볼을 처리하려던 베테랑 골키퍼 김승규와 신예 센터백 이기혁의 동선이 겹치며 발생한 충돌은 결국 루이스 로모에게 결승골을 헌납하는 뼈아픈 결과로 이어졌다.
경기가 끝난 뒤, 포털과 SNS상에는 두 선수를 향한 매서운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이번 대표팀의 수비진 중 K리거로서 유일하게 1, 2차전 모두 선발 출전하며 고군분투 중인 이기혁에게 쏟아지는 화살은 유독 잔인하다. 그러나 ‘기휘불체(驥騉不滯)’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천 리를 달리는 명마는 작은 진흙탕에 발이 빠졌다고 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 무대에서 겪은 호된 신고식은 한 선수를 주저앉히는 걸림돌이 아니라, 장차 대한민국 수비를 짊어질 명품 수비수로 거듭나게 할 값진 예방주사다.
냉정하게 짚어보자. 이기혁은 이번 대회 직전까지 홍명보호의 완벽한 주전 자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선 무대에 합류하자마자 김민재, 이한범과 함께 스리백의 왼쪽 축을 맡아 세련된 패스 능력과 안정적인 빌드업으로 대표팀의 고질적인 수비 불안을 지워내던 주역이다. 체코전 역전승의 숨은 공신이었던 그가 멕시코 홈 관중의 귀를 찢는 듯한 함성 속에서 순간적으로 콜플레이를 듣지 못해 발생한 사안을 두고 ‘패배의 원흉’으로 낙인찍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실수 없이 성장하는 위대한 선수는 없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끈 홍명보 감독도 선수 시절 실수를 경험했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는 김민재도,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도,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도 결정적인 실수와 실패를 겪으며 성장했다. 위대한 선수와 평범한 선수를 가르는 기준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 이후 어떻게 일어서는가에 있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는 김민재 역시 수많은 실책과 비판을 이겨내며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랬기에 김민재는 경기 후 믹스트존에서 "경기를 하다 보면 나올 수 있는 실수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오직 다음 경기에만 집중해야 한다"라며 후배를 감쌌다. 35세의 최고참 김승규 역시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때 이기혁을 가장 먼저 안아주며 "빨리 잊자, 우리가 뒤에서 버티면 된다"라고 격려했다. '그라운드의 사령관'들이 이토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이유는 실수를 비난하는 것보다 선수의 기를 살려 다음 전장을 준비하는 것이 훨씬 이롭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다.
정작 선수들은 이미 다음 경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외부에서 희생양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모든 선수가 실수 한 번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된다면 과연 남아날 선수가 있을까. 공격수는 슈팅을 놓치고, 수비수는 마크를 놓치며, 골키퍼는 실점한다. 축구란 원래 그런 스포츠다. 실수의 가능성을 안고도 다시 도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드라마다.
전설적인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나는 커리어 동안 9,000번 실패했고, 26번이나 게임을 끝내는 위닝샷을 놓쳤다. 나는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지금 이기혁과 김승규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적인 비난이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최종전에서 다시 한번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팬들의 따뜻한 격려다.
홍명보호는 여전히 조 2위(1승 1패·승점 3)를 달리고 있으며, 남아공전에서 무승부만 거둬도 자력으로 32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실수를 교훈 삼아 더 단단해진 이기혁이 다가오는 최종전에서 통쾌한 반전의 드라마를 쓰기를 기대한다. 명마는 진흙탕 속에서 비로소 그 진가를 증명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