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오버뷰] 또 멕시코, 또 A조 2차전…43년 만의 '평행이론' 기대


1983년 콩나물시루 교실의 환호…43년 만에 재현되는 A조 2차전 평행이론
선인장의 나라, 그 거대한 고원을 넘어설 시간

멕시코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지난 3월28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A매치 평가전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멕시코시티=AP 뉴시스

거대한 대륙, 뜨거운 열정의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마침내 6월 11일 막을 올립니다. <더팩트>는 전 세계 축구 축제의 이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치는 새 연재 [월드컵 오버뷰]를 신설합니다. 단순한 승패와 피파랭킹이라는 숫자의 함정을 넘어, 그라운드 위 베테랑들의 묵직한 서사와 철저한 전술 분석, 숨겨진 팩트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겠습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전통 강호 체코의 숨은 칼날을 분석한 이영규 전문기자의 첫 분석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위대한 도전과 월드컵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독자 여러분께 배달합니다.<편집자 주>

[더팩트 | 이영규기자] 1983년 6월의 어느 날 새벽, 쿰쿰한 분필 가루와 땀 냄새가 섞인 고등학교 3학년 교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침 자습을 위해 일찍 등교하던 한 학생의 품에는 커다란 브라운관 TV 수상기가 안겨 있었다. 교탁 위에 얹어진 브라운관을 본 급우들은 환호를 질렀고, 교실 뒤편에선 벌써 서너 명이 일어나 슛 동작을 취하며 북새통을 이뤘다. 뒤이어 들어선 담임 선생님은 인상을 쓰며 "누구 짓이야?" 하고 호통을 치더니, 이내 츤데레 같은 핀잔을 던졌다. "빨리 안 틀고 뭐 하냐?"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사우디 사막에서 고생하시는 중동 근로자 여러분, 이제 대한민국 대표팀이 세계 무대에서…"로 시작하는 캐스터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콩나물시루 같던 교실은 이내 숨을 죽였다. 미처 TV를 준비하지 못한 옆 반 학우들까지 밀려들어 100여 명이 넘는 눈동자가 총천연색 컬러텔레비전 속 빨간 유니폼으로 향하던 그 감격.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U-20) 4강 신화를 쓴 ‘박종환 사단’의 8강 우루과이전, 준결승 브라질전을 지켜보던 학창 시절의 풍경이다. 당시 붉은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뛰는 한국 선수들을 보고, 외신이 '붉은 악령들(Red Furies)'이라 불렀다고 하고, 이것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붉은 악마'의 모태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 축구가 이번 월드컵 개최국이자 조별리그 두 번째 상대인 멕시코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존 웨인이 나오는 서부영화 속 ‘선인장의 나라’로만 알았던 이역만리의 땅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자, 한국 스포츠가 세계 무대에 존재감을 알린 첫 관문이었다. 당시 공격의 핵이었던 '4강 신화의 주역' 신연호와 김종부는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 선린상고 출신 야구선수 박노준, 김건우의 인기를 순식간에 대체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2023년10월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대한민국과 튀니지의 축구대표 평가전이 열리기전 선수단과 관중들이 83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최초 4강 신화를 이룬 고 박종환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더팩트DB

◆ A조 두 번째 상대 멕시코… 43년을 뛰어넘은 평행이론

43년 전 당시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멕시코를 2-1로 꺾고 2승 1패,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올랐다. 기막힌 평행이론일까. 놀랍게도 당시 우리 조는 A조였고 ‘1차전 스코틀랜드, 2차전 멕시코, 3차전 호주’ 순이었다. 개최국 멕시코를 두 번째 상대로 만나는 대진 플로우가 2026년 현재와 자로 잰 듯 똑같다. 당시 1차전에서 유럽의 복병 스코틀랜드에 0-2로 패했던 아픈 기억은, 이번 대회 1차전 상대인 체코를 향해 우리가 얼마나 철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엄중한 교훈을 남긴다.

1983년의 강렬한 기억 탓에 멕시코는 늘 우리에게 만만한 상대처럼 착각되곤 했다. 그러나 성인 무대(A매치)에서 마주한 ‘엘 트리(El Tri)’는 늘 영리하고 거대한 벽이었다. 역대 전적 15전 4승 3무 8패의 열세. 특히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는 쓰라린 잔혹사만 남겼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첫 경기에서 하석주의 선제골 이후 1-3으로 역전패하며 대회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선 첫 경기 스웨덴전 패배에 이어 2차전에서 멕시코에 1-2로 덜미를 잡혔다. 사실상 자력 진출의 꿈이 사라진 채, 가능성 희박한 '경우의 수'에 목을 매야 했던 처량한 처지로 내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멕시코 간판 공격수 라울 히메네스가 지난 3월31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상대 수비수에 앞서 볼을 컨트롤 하고 있다./ 시카고= AP 뉴시스

◆ 빅리그 '히메네스 형제'의 날카로운 창, 틈새 찾기 힘든 견고한 포백

이제 홍명보호가 마주한 2026년의 멕시코는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과 ‘레전드’ 라파엘 마르케스 수석코치가 지휘하는 대단히 실리적이고 단단한 팀이다. 과거의 화려함 대신 철저하게 승점을 따내는 수비 블록을 구축했다. 리가 MX(멕시코 리그) 최고의 클럽들에서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춘 자원들이 뼈대를 이뤄 결속력이 단단하며, 무엇보다 해발 1571m에 달하는 과달라하라의 고지대 환경에 완벽히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도 스쿼드 핵심은 유럽파다. 전방에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부활한 베테랑 라울 히메네스(풀럼FC)의 노련한 제공권과 이탈리아 명문 AC 밀란이 선택한 차세대 에이스 산티아고 히메네스의 날카로운 슈팅력이 신구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윙백 자원 헤수스 가야르도(톨루카)와 호르헤 산체스(PAOK)의 왕성한 활동량과 한 박자 빠른 공수 전환이 전방의 화력을 보좌한다.

수비조직력도 견고하다. 올해 치른 A매치 6경기에서 1실점이 전부다(4승2무). 31일 한국전 맞춤형으로 호주, 4일에는 '가상 체코' 세르비아와 평가전을 계획중이다. 다만 3선의 핵심 에드손 알바레스(페네르바흐체)가 부상 여파로 실전 감각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가 파고들어야 할 전술적 틈새다. 특히 마크 맨을 놓칠 때 수비전환 속도가 느리다는 약점을 역이용할 수 있다.

결국 해답은 지난해 9월 미국에서 가진 평가전(2-2 무승부)의 기억에 있다. 당시 요한 바스케스(제노아)와 헤수스 푸라타(티그레스)가 버틴 멕시코의 중앙 수비진은 피지컬이 좋지만, 돌아서는 동작과 배후 공간 침투를 제어할 때 민첩성에서 명확한 약점을 드러냈다. 본선에는 세사르 몬테스(로코모티브)가 바스케스와 호흡을 맞출 것으로 보이지만, 오현규가 전방에서 거칠게 부딪치며 균열을 내고, 그 틈을 타 손흥민이 하프 스페이스에서 순간적으로 배후로 침투한다면 멕시코의 촘촘한 포백 블록을 무너뜨릴 가장 치명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다만 공기 저항이 적어 공이 평지보다 빠르고 길게 구르는 고지대 특성상, 패스의 강약 조절과 스프린트 타이밍의 정교함이 평소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지난해 9월10일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한국과 멕시코간 평가전에서 한국 수비수 김민재(왼쪽)가 멕시코 공격수 헤르만 베르테라메를 저지하며 공을 탈취하고 있다. / 내슈빌(미 테네시주)=AP 뉴시스

◆ 고지대의 불리함, 43년 전 '박종환 사단'이 남긴 패턴 플레이의 교훈

43년 전 박종환 사단이 산소 부족 상황을 대비해 선수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훈련했던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하지만 당시 박 감독이 대회를 준비하며 이른바 '10개의 전술'을 준비했다는 이야기 역시 유명했다. 대중은 이를 무슨 비밀스러운 필살기처럼 여겼지만, 그 실체는 철저하게 약속된 '패턴 플레이'의 집약체였다.

당시 대회에서 3골을 터뜨리며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신연호 현 고려대 감독은 대회 성공의 진짜 비결로 바로 이 반복된 전술 훈련을 꼽았다. 그는 "실제로는 6개 정도의 확실한 전술 패턴을 만든 뒤, 이를 몸이 먼저 반응할 때까지 무한 반복 숙달했던 것이 결정적 도움이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막연한 요행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약속된 전술 패턴'이 고지대의 한계를 지워버린 진짜 비책이었던 셈이다. 홍명보호는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만의 디테일한 전술 패턴을 어느 정도 완성해 두었을까.

43년 전, 선인장의 나라 멕시코는 청춘들의 땀방울과 치밀한 준비로 세계 4강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약속의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 홍명보호는 그 거대하고 숨 가쁜 고원을 넘기 위한 현지 적응 훈련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단순한 환경 적응을 넘어, 상대의 약점을 완벽히 파고들 전술적 약속이 완전하게 빌드업되기를 바란다. 고3 교실을 가득 채웠던 그 시절의 뜨거운 에너지가 다시 한번 북중미 대륙에 울려 퍼지기를, 한국 축구의 위대한 서사가 잔혹사를 끊어내고 다시 한번 증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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