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억 함정' 양민혁, 이름값보다 '운동장'이 먼저다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코번트리 이적 후 사라진 3개월, 출전 시간 단 29분
화려한 엠블럼의 역설, 벤치에서 시들어가는 천재들

양민혁(왼쪽)이 2024년 12월 토트넘에 합류했을 당시 손흥민과 함께 트레이닝룸에서 몸을 풀고 있다. /토트넘 SNS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바다 건너 들려오는 소식에 팬들의 마음이 무겁다. 한국 축구의 미래로 꼽히던 양민혁(20)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올 초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코번트리 시티로 재임대될 당시만 해도 기대는 남달랐다. 전반기 포츠머스 임대 시절 16경기 3골 1도움으로 가능성을 보였고, 무엇보다 ‘잉글랜드의 전설’ 프랭크 램파드 감독이 그를 직접 원해 이뤄진 ‘업그레이드 임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이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눈앞에 둔 축제의 현장에 양민혁의 자리는 없다. 지난 2월 8일 옥스퍼드 유나이티드전 교체 출전 이후, 그는 명단에서 자취를 감췄다. 리그에서 단 3경기 총 출전시간 29분이 전부다. 최근 16경기 중 명단 포함은 단 6회. 벤치에 앉는 것조차 버거운 것이 2026년 봄, 양민혁이 마주한 가혹한 성적표다.

최근 국내 U-23 대표팀 소집 훈련에서 보여준 ‘좋은 몸 상태’와 한일 비공식 평가전의 ‘도움 기록’은 역설적으로 더 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뛸 준비는 되어 있지만, 뛸 곳이 없다. 결국 그는 코번트리 시티에서의 기대를 접고 벨기에 리그 등으로의 이적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60억 원의 착시와 '로 리스크'의 함정

양민혁은 한국 축구계의 신성으로 불렸다. 18세의 나이에 K리그 강원FC와 프로 계약을 맺고 첫해 12골 6도움을 기록하며 영플레이어상을 거머쥐었다. 토트넘 홋스퍼가 아직 10대인 그에게 6년 장기 계약을 안기며 유니폼을 전달했을 때, 대한민국은 들썩였다.

강원에 지급한 이적료 역시 K리그 역대 최고 수준인 60억 원 선. 하지만 60억 원은 국내에선 경이로운 액수일지 몰라도, 수천억 원이 오가는 토트넘의 회계 장부에서는 ‘실패해도 부담 없는 비용’에 불과했다. 구단은 그를 직접 케어하기보다 임대를 통해 ‘알아서 크길’ 기다린다.

문제는 임대지의 현실이다. 승격 전쟁 중인 코번트리 시티에 유망주 육성은 사치다. 당장의 승리가 절실한 감독은 검증된 베테랑을 먼저 세운다. 현장의 생존논리와 비정한 손익계산서가 양민혁을 11경기 연속 명단 제외라는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21세 이하팀에서 관리받고 있는 한국축구의 또다른 유망주 박승수 역시 마찬가지다. 성인 무대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며 성장해야 할 '골든타임'이 연습 구장에서 소모되고 있다.

◆ 실력보다 무서운 논리, "몸값이 기회를 만든다"

자본이 지배하는 빅리그에서 주전 경쟁은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기준은 냉정하게 ‘투자 대비 효율’이다. 미 프로야구 LA 다저스 김혜성이 올해 시범경기 4할 타율에도 불구하고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한 이유 역시 같다. 구단 입장에서는 고액 연봉자를 먼저 증명시켜야 하는 경영적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6년 총액 약 1,500억 원의 이정후는 부진해도 구단이 끝까지 밀어줘야 하는 ‘핵심 자산’인 반면, 3년 연봉 총액 1250만 달러(약 184억원)의 김혜성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로 리스크(Low-risk)’ 자원이다. 헐값에 들여온 유망주보다 고액 투자자가 실패했을 때 프런트가 짊어질 비난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 결국 라인업은 실력이 아니라 ‘몸값 순’으로 짜인다.

축구는 더 지독하다. 이미 실력이 입증된 스타도 이 늪에 빠지면 허송세월한다. AS 모나코의 황태자였던 박주영은 2011년 아스널 이적 후 당시 사령탑 아르센 벵거 감독의 외면 속에 ‘유령 선수’가 되었고, 2007년 미들즈브러에 진출한 이동국 역시 리저브를 전전하며 짧은 출전 시간 끝에 1년 만에 방출됐다. 이들에게 화려한 엠블럼은 자부심이었으나, 구단에게 그들은 긁어보고 아니면 버리는 ‘복권’에 불과했다.

◆ '이름값'보다 '운동장'을 선택한 생존자들

반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실리를 택한 이들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서 닦은 실력으로 프리미어리그 주전이 된 사례는 정석과도 같다. 양민혁에 1년 앞서 스코틀랜드 리그로 진출한 강원 출신 양현준이 팀내 경쟁을 이겨내고 셀틱의 주전 입지를 다져가는 경우나, 스위스 그라스호퍼에서 9번 스트라이커로 뛰는 이영준의 선택은 매우 현실적이다.

이영준은 팀이 하위권일지라도 매 주말 실전 경험치를 쌓는다. 이는 벤치를 지키는 빅리거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자산이다. 터키 베식타스에서 부활한 오현규 역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셀틱)을 과감히 벗어 던진 ‘유연한 후퇴’가 커리어 하이라는 ‘더 큰 전진’으로 이어졌다.

QPR의 윙포워드 양민혁(왼쪽)이 15일 더비 카운티와 2024~2025 잉글리시 챔피언십(2부) 33라운드 홈 경기에서 볼을 다투고 있다./QPR SNS

◆ 선수는 운동장 위에 있을 때 빛난다

해외 진출을 앞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다. "나는 이 팀에서 뛸 수 있는가?" 선수의 가치를 증명하는 곳은 클럽의 이름값이 아니라 운동장이다. 빅리거다운 몸값 계약을 맺기 전까지 우리 선수들은 냉정히 말해 ‘잠재적 자원’일 뿐이다. 선수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를 뛰며 얻는 경험 수치다. 양민혁처럼 임대지의 성격(성적 압박)을 간과하거나, 김혜성처럼 명문팀의 뎁스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오늘날 한국 축구의 기둥이 된 선배들을 보라. 손흥민이나 이강인처럼 아예 빅클럽 유스시절부터 강인하게 살아남은 이들도 있지만, 황희찬·김민재·이재성처럼 중소 리그와 하부 리그로 진출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운동장’을 누비며 올라온 이들이 주류다. 이름값에 매몰되어 벤치에서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실전의 무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선택하는 전략적 지혜가 절실하다. 결국, 선수는 운동장 위에 있을 때 빛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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