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단 3분. 그것도 정규시간이 아니라 추가시간 종료 휘슬 3분을 남긴 시점이어서 더 그랬다. '설마, 이번에도'라는 마음은 점점 사라져갔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16강전의 극적인 종료 직전 동점골의 임팩트가 너무 강하다 보니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공격 전개 과정에서 유기적 플레이보다 선수들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상황이 상대 '늪 축구'에 계속 막히자 이대로 끝나는가 싶던 순간, 바로 그 드라마 같은 반전 상황이 또 연출됐다. 아, 이게 가능하다니!
3일 오전 0시 30분(한국시간) 카타르 알와크라의 알자눕 스타디움(관중 수용규모 44,325명). 한국과 호주의 2023 AFC(아시아축구연맹) 카타르 아시안컵 8강전 제 2경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로 꼽히는 두 팀의 대결 양상은 호주의 실리축구가 정규시간을 지나 추가시간 4분까지 승리를 거두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TV 중계화면을 통해서 전달되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응원가는 왜 또 그리 선명하게 들리는지.
'열사의 땅' 중동에서 한국 선수들은 응원하는 팬들은 어떤 마음으로 저 노래를 불렀을까? 가수 윤도현의 '아리랑 응원가'는 애절한 가사 내용과 달리 흥겨운 편곡으로 스포츠 경기장에서 자주 불리는 응원가인데, 이날은 왠지 더 구슬프게 들렸다. 아마도 풀리지 않는 한국 축구의 답답한 모습을 보며 한민족 특유의 감성이 자극을 받은 듯했다.
씁쓸한 속마음을 달래며 서서히 기사를 마감하고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 한 잔 할까, 남겨둔 와인을 마저 비울까란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 손흥민의 드리블 돌파가 이어졌다. 0-1로 뒤지던 후반 추가시간 4분(90+4분). 오만의 아흐메드 알카르 주심이 추가시간을 7분 줬으니 경기 종료까지 약 3분을 남긴 상황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16강전에서는 정규시간 90분까지 0-1로 끌려가다 후반 추가시간 10분 가운데 9분을 소화하고서야 조규성의 헤더 동점골(90+9분)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었다. 그 감동의 여운이, 그 기대가 아직 남아있는데.
어, 어 왜 저리 또 고집을 피우지? 손흥민 주위로는 무려 3~4명의 호주 수비수들이 파도처럼 밀려들며 압박을 가하는데 손흥민은 집요하게 골마우스 왼쪽 돌파를 노렸다. 마치 수초를 헤집는 물고기처럼 볼을 드리블했으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강인의 침투 패스가 절묘한 데다 손흥민이 볼을 잡아 마지막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는데 또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다 득점 기회가 무산되나 싶었다.
그런데 손흥민은 다 생각이 있었다. 그 '빅 픽처'를 읽지 못 해 답답할 뿐이었다. 손흥민의 돌파를 저지하던 호주 교체멤버 루이스 밀러가 참지 못하고 뒤에서 오른발 태클로 손흥민을 걷어찼다. 오만 주심은 VAR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페널티 파울을 불었다. 이어진 VAR 판정도 페널티 파울이 맞았다.
그런데 또 변수가 생겼다. 가슴을 졸이던 VAR 판정을 지켜보는 사이, 황희찬이 볼을 들고 페널티 마크를 서성거렸다. 마치 내가 찰 거야, 건들지 마!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했다. 사실 한국대표팀에서는 페널티킥 1번 키커로 손흥민이 정해진 상태였고, 파울 역시 손흥민이 얻어낸 터라 당연히 손흥민이 찰 줄 알았는데 어딘가 약간은 불안한 황희찬이 키커로 자원할 줄이야.
클린스만 감독을 비롯한 벤치에서도 손흥민이 찰 것을 주문했으나 손흥민의 생각은 달랐다. 벤치의 지시를 외면하고 자신감을 보이는 황희찬에게 킥을 맡겼다. 황희찬은 주심의 휘슬에도 불구하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더니 강한 오른발 슛으로 호주 왼쪽 골망을 흔들었다. 후반 추가시간 90+6분. 종료를 딱 1분을 앞둔 시점에 동점골이 터졌다. 페널티 파울이 선언되고 성공하기까지 약 2분, 그 시간은 정말 길었다. 대개 페널티킥을 앞두고 생각이 많은 선수는 실축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데, 황희찬은 '생각은 신중히, 킥은 강하게'란 신념을 실천하듯 사우디 아라비아전 마지막 승부차기 성공처럼 골문을 시원하게 열었다.
손흥민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상대 수비수의 파울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페널티 박스 안에서 드리블을 길게 했다"고 설명했다. 연계 플레이로 골을 노리기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수많은 빅 매치를 치러본 자신이 상황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적중했다.
손흥민은 또 황희찬의 페널티킥 상황에 대해서도 이유를 밝혔다. "페널티킥은 원래 제가 차기로 돼 있었는데 희찬 선수가 볼을 잡고 너무 자신감을 보였다. 벤치의 지시가 있었지만 희찬 선수를 믿기로 했다. 성공해줘서 정말 기뻤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한국의 짜릿한 역전극은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의 역전 두 골이 모두 세트플레이 상황에서 나왔다. 그것도 손흥민이 전부 끌어냈다. 그 전까지 상황은 안 좋았다는 얘기다. 벤치에서 사전에 주문한 전략과 전술이 안 통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벤치의 전략 전술에 따른 승리라기보다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등 몇 몇 특급 선수의 개인기에 의한 승리로 볼 수 있다. 오픈 플레이에서 호주에 철저히 막혔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한국은 전반 70%-30%의 우세한 볼 점유율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슛도 기록하지 못 했다.
실제로 한국이 9년 만에 '사커루' 호주를 상대로 극적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상대 벤치의 전략적 실수에 기인한 바도 크다. 호주의 그레이엄 아놀드 감독은 전반 42분 굿윈의 선제골을 지키기 위해 후반 5명의 선수를 교체하며 체력전으로 밀어붙였는데, 결국 이 수가 악수가 되고 말았다. 후반 교체멤버로 들어온 수비수 루이스 밀러는 손흥민을 견제하다 페널티 파울을 범했고, 미드필더 에이든 오닐은 황희찬에게 태클을 하다 퇴장을 당했다.
클린스만 감독의 운은 정말 좋은 것일까. '해줘!'만 하면 다 되는 것일까. 64년 만의 우승을 목표로 아시안컵에 출전한 한국의 클린스만 감독은 조별리그 3경기 모두를 힘겹게 치른 데 이어 토너먼트에서도 2경기 연속 연장 120분을 소화하며 지지 않고 4강에 올랐다. 한국이 4강에 오른 게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한국의 경기 상황을 보면 그저 답답하고 눈물만 날 뿐이다. 세계에서 인정하는 선수들을 데리고 이렇게 우리가 고전하면서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러야 하다니.
클린스만 감독과 함깨하는 여정이 한국으로선 다행일까, 불행일까.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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