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은 '남북 유엔(UN) 동시 가입'과 유기적으로 연계됐다. 당시 회담을 계기로 유엔 가입 문제와 관련한 남북 실무대표 접촉이 세 차례 진행돼서다. 북한은 단일 가입을 줄곧 고집했지만 승산이 없다고 판단, 남북 동시 가입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1990년 9월 4~7일 1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3개항 긴급과제' 중 하나로 유엔 가입 문제를 언급했다. 고위급회담 합의 전까지는 어느 쪽도 먼저 유엔에 가입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90년 9월 18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유엔(UN) 가입 문제와 관련한 1차 실무대표 접촉이 진행됐다. 우리 측은 임동원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이, 북한 측은 최우진 외교부 순회대사가 남북 대표로 마주 앉았다.
북한 측은 남북이 단일 의석으로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대표권을 공동 또는 교차로 행사하고, 결의권은 협의를 통해 찬반 또는 기권으로 처리하자고 말했다. 또 유엔에서 결의된 의무 이행은 남북이 공동 보조를 취하되, 불가피하다면 '각자' 의무 이행을 하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제안도 내놨다.
당시 최 대사는 "우리의 기본 입장은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나라의 분열이 영구 고착되는 것을 막고, 통일을 실현하려는 염원으로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 유엔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일 통일이 실현되기 전에 기어코 유엔에 들어가려 한다면 북과 남이 두 개의 의석으로 각기 들어갈 것이 아니라 통일 위업에 이롭게 하나의 의석으로, 공동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우리는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측은 즉각 단일 의석 가입은 유엔 헌장에 어긋난다고 반박했다. 또 쌍방 합의에 따른 결의권 등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했다.
임 원장은 "남북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고 합법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과거와 현재에 비춰봐서 그런 우려를 가질 하등의 근거가 없다"고 받아쳤다.
임 원장은 "일찍이 유엔에 함께 들어간 남예멘과 북예멘은 이미 통일이 됐고, 동독과 서독은 2주 후에는 통일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며 "유엔 회원국 자격과 분단국의 통일 문제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오히려 통일에 유리한 분위기를 촉진해 준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그는 1차 실무대표 접촉 직후 기자회견에서 "북측이 가장 아주 시급한 과제로서 굉장히 부담을 갖고 제기하는 문제가 유엔 가입 문제"라며 "어떻게 보면 유엔 가입 문제가 남북고위급회담을 가능케 한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2차 실무대표 접촉은 1990년 10월 5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당시는 한국이 유엔 가입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소련과 수교(1990년 9월 30일)를 맺은 뒤였고, 북한은 "한국과 소련 수교는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인 방해가 된다"고 반발하던 때였다.
우리 측은 유엔 헌장 제4조를 들며 북한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설명했고, 북한에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유엔에서 제기되는 여러 안건에 있어 남북이 사전에 협의·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꾸리자는 의미였다. 당시 동독과 서독도 통일로 가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며 유엔에 동시 가입한 바 있었다.
하지만 북한은 동시 또는 단독 가입은 '두 개 조선 정책'이자 '분열정책'이라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우리 측은 동시 가입 반대 시 단독 가입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고, 북한은 크게 반발했다. 1990년 11월 9일 열린 3차 실무대표 접촉에서도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후 우리 측은 1991년 4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을 계기로 유엔 가입과 관련해 소련을 설득했다. 여기에 1991년 5월 리펑 중국 총리가 북한에 '한국의 유엔 가입 반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입장까지 밝히게 됐다. 한국의 유엔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이뤄졌던 북한의 물밑 외교전이 동력을 잃은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1991년 7월 8일 북한이 먼저 유엔 가입을 신청했고, 우리도 그해 8월 5일 가입 신청에 나섰다. 이어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유엔 가입안이 159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같은 기간 남북고위급회담도 지속되면서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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