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세정 기자] 여름마다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는 한국 사회가 마주하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정치권으로 향한다. 수해복구 현장을 찾는 정치인들은 깊은 위로를 전하지만, 때로는 실망과 분노를 자아내며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24일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당대표 직무대행과 정청래·박찬대 당대표 후보는 경기 가평군 조종면을 찾아 수해복구에 나섰다. 정 후보와 박 후보는 당대표 경선 중에도 선거운동 대신 피해 현장을 찾아 수해복구에 집중하고 있다. 정 후보는 22일 전남 나주, 경남 산청·합천을 찾은 데 이어 23일에는 충남 아산을 방문했다. 박 후보도 전북 남원, 전남 곡성·나주 등을 돌았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과 김정재 정책위의장, 정점식 사무총장을 포함한 의원 40여 명이 22일 충남 예산을 방문했고, 김문수 당대표 예비후보도 같은 곳을 찾아 복구 작업에 참여했다.
◆ 상징적 방문에서 소통의 매개체로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시기마다 정치인들의 수해복구 현장 방문이 반복되는 현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재난현장에 정치인이 방문하는 것은 지도자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고,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한 상징적 성격이 강했다.
수해복구 현장 방문이 소통의 매개체로 본질이 변화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9년 8월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은 경기 북부 지역을 방문해 복구 작업 현장을 세심히 점검하며 주민들과 직접 소통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낙담한 주민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복구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당부했다. 2002년에도 강원 강릉, 경남 김해 등을 찾아 수재민들을 위로했다. 기존의 권위적 태도에서 벗어나 고통에 공감하고,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 노무현식 '탈권위 리더십'의 시작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시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로 짚을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2년 태풍 루사로 고향 김해가 큰 피해를 입자 현장을 방문했다. 장화를 신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진흙을 퍼내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은 탈권위적이고 서민적 리더십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정동영 의원 등 소속 의원들과 함께 충북 영동을 방문해 떠내려온 쓰레기를 직접 치우는 등 '보여주기식' 방문을 넘어서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노 전 대통령은 태풍 매미로 피해를 본 이재민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는 등 재임 중에도 수해현장을 종종 찾았다.
이때부터 정치인이 수해복구 현장에서 실제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주요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집중호우나 태풍 피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수해 현장을 찾는 것이 일종의 정치적 책무로 인식되는 구조가 형성된 시점이다. 흙더미를 퍼내는 모습은 정치인의 현장 리더십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특히 2010년대 들어 대중정치가 강화되고, 정치인의 이미지와 퍼포먼스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수해복구 현장은 더욱 빈번한 정치적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최수영 정치평론가는 "정치인이 수해복구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재난 현장이 국민에게 더 전파된다"며 "(국민들도) 함께 나서야겠다는 동질성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벤트성' 비판에 각종 논란까지
하지만 이런 활동이 모두 긍정적 평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경쟁적 방문이 늘어나면서 '이벤트에 불과하다'라는 비판적 시선도 커졌다.
2017년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충북 청주 수해복구 현장에서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장화를 신는 모습이 포착돼 '황제 의전' 논란에 휘말렸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2020년 경기 안성 수해복구 현장에서 찍은 사진 속 티셔츠와 장화가 너무 깨끗하다는 비판을 받고 해당 사진들을 삭제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김문수 예비후보가 22일 예산 수해복구 현장에서 담금주를 들고나오며 "술 한잔하면 좋겠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시민이 "네?"라고 되묻자 김 예비후보는 "술은 멀쩡한데 버리려고 그러네. 이 술은 먹어도 되겠구먼"이라고 답했다. 물건을 신중하게 골라내려는 취지로 해석되지만, 수해 상황에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