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일본인 독립운동가 서훈 확대 고려해야"


22일 이강일 민주당 의원 토론회
"독립운동 후 전향한 일본인도 고려"
서훈 신청 과정서 자료 확보 난관

올해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일본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확대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사진은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강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모임 독립 공동 주최로 열린 관련 토론회. /국회=송호영 기자

[더팩트ㅣ국회=송호영 기자] 올해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일본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확대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강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모임 독립 공동 주최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본시민 서훈 현황과 발굴 서훈의 당위' 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회에는 강창일 전 주일대사,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 김창덕 국민문화연구소 회장 등이 참석했다.

기조 발제를 맡은 김경일 명예교수는 이소가야 스에지와 미야케 시카노스케 등 일본인의 삶을 소개했다. 이소가야는 1930년대 조선인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을 한 혐의로 8년 10개월가량 투옥됐다. 미야케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시절 반제(반제국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독립운동가 이재유를 숨겨 준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2년 1개월을 투옥했다.

김 명예교수는 이소가야에 대해 "오늘 다룬 사람 중에서 가장 배우지 못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일관되게 살아간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전향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일본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소가야는 조선인 사회에 전폭적으로 개입했다"며 "하층 노동자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지배 민족의 일원이자 제국의 퇴역 군인 신분으로 조선인 사회에 직접 들어가 일상과 주거를 함께함으로써 본인이 경험하지 못한 피식민사회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고 강조했다.

미야케에 대해선 "교수로서, 도쿄대학 출신이고 일본 사회에서는 상층의 엘리트 코스를 나온 인물이 반제국주의 운동에 연관됐다"며 "그것 때문에 경성제대에서 해임당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김 명예교수는 미야케가 훈장을 받지 못한 이유에 전향 문제가 연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보훈 기준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일본으로 전향했다면 (서훈이) 안된다"고 밝혔다.

다만 김 명예교수는 "전향 문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경우가 다른 것 같다"며 "우리가 구분해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인의 경우 전향은 자기 민족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와 공론화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독립운동을 하다 전향한 일본인을 서훈하는 문제에 대해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토론회에 참석한 김 명예교수. /국회=송호영 기자

토론회에서는 기존에 훈장을 받은 일본인 독립운동가의 공적도 재조명됐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독립유공 훈장을 받은 순수 외국인 독립운동가 76명 중 일본인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독립운동가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등 두 명뿐이다.

김명섭 교수는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사로 유명한 후세 다쓰지를 소개했다. 후세는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했고,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했다. 박열과 가네코를 변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는 후세에 대해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그의 말에 맞게 인생을 산 분이 아닌가 한다"고 평했다.

이어 "후세는 1932년 법정 모독으로 인해서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됐고, 금고 3개월 실형을 받았다"며 "1944년에는 둘째 아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형무소에서 옥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명섭 교수는 또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전향하지 않고 천황 체제와 싸웠던 시민운동가들도 서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창덕 회장은 가네코의 삶을 조명했다. 가네코는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배우자인 박열과 함께 1926년 3월 25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가네코는 그해 7월 23일 23세로 의문사했다. 그 후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 회장은 가네코에 대해 "일본 사회가 상당히 우경화돼서 가네코에 대한 인식들이 썩 좋은 편만은 아니다"라며 "유족들이 의혹을 받는 상황이라 (추모식이) 더 이상 지속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토론의 좌장을 맡은 강창일 전 주일대사는 "국가보훈부에서 과제로 발굴해서 일본인들에 대한 서훈 문제를 고민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독립 서훈할 때 입증의 책임은 국가보훈부에 있고, 따라서 연구원을 배치해 조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유가족이) 신청하게끔 돼 있다"며 "국가보훈부가 인력을 더 배치해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독립 유공자 서훈 심사는 국가보훈부 공훈심사과의 발굴이나 유가족 등의 신청을 받아 진행된다. 다만 신청의 경우 해당 인물의 독립운동 과정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hysong@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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