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㊴] 한중 수교로 '北 물품 위장 반입' 실마리 찾아


중국산을 북한산으로…반입 사례 증가
중국은 협조 거부, 북한은 모르쇠 일관
수교 체결로 소통 시작…대책 마련 첫발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중국산 물품이 북한산으로 둔갑해 국내로 반입되던 문제가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를 계기로 해결의 첫발을 뗄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김정수 기자] 부산 세관은 1991년 6월 24일 국내 수산물 업체가 중국 수출 업체와 결탁, 중국산 냉동 홍어 등을 북한산으로 위장 반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북한산 물품은 남북교류촉진법에 따라 무관세로 수입됐는데, 이를 악용했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국내 업체는 "중국 업체가 대련에서 출항해 북한 신의주에 입항했고, 냉동 홍어 등을 적재한 뒤 한국으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외무부(외교부)는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중국 대련 해관 당국'과 '북한 대사관'에 사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먼저 주북경 대표는 1991년 7월 중국 요녕성 대외경제무역위원회에 대련 세관이 '수출허가증'을 발급했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이에 무역위는 "발급한 사실이 없다"며 구두로 답했다. 주북경 대표는 수사 중인 사안이라 공문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무역위는 어찌 된 일인지 이를 거절했다.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중국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까닭은 양국 수교가 체결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 사건 외교 전문에는 '중국 정부는 양국 간 외교 관계 부재를 이유로 공문상 사실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적혀 있다. 한중 수교는 1992년 8월 24일에야 이뤄졌다.

주북경 대표가 정부에 보낸 외교 전문. 중국 정부가 외교 관계 부재를 이유로 협조할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외교부

이후 주북경대표는 1991년 9월 주중 북한 대사관에 사건 경위를 설명하고, 북한이 원산지 증명 시 사용하는 '관인' 견본을 제공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 대사관은 "당사자에게 문의하라"며 잘라 말했다. 주북경 대표는 "북한 관인은 북한 대사관에서 확인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북한 대사관은 "우리와 관계없다"며 함구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산 물품이 북한산으로 위장돼 반입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교 전문에는 '주홍콩 총영사관 첩보와 같이 중국산 물품을 북한산으로 위장해 수입한다는 첩보가 유포되고 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가 최근 1년간(1991년 5월~1992년 5월) 파악한 북한산 위장 반입 규모는 모두 105억9100만원이었다. 특히 북한산으로 위장한 중국산 물품이 101억800만원(95.43%)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1992년 7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한 김달현 북한 경제부총리는 "내가 허가한 대남 반출 물자 규모는 남한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작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부가 1991년 5월~1992년 5월 파악한 북한산 위장 반입 검거 실적. 당시 돈으로 105억9100만원이었으며 중국산 물품이 101억800만원(95.43%)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외교부

이에 정부는 1992년 8월 5일 관계 부처 회의를 열고 '북한산 물품 위장반입 방지 대책 검토'를 개시했다. 하지만 중국의 적극적인 협조가 전제되지 않는 한 북한산 위장 물품 반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가 골머리를 앓는 사이 한중 수교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대책 회의 20일 뒤의 일이었다.

정부는 곧장 중국 주요 무역항에 관세관 파견을 검토했고, 중국에는 '단순 경유' 북한산 물품과 '수입 통관' 북한산 물품을 구별할 수 있는 증빙 서류를 발급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위장 반입 사례 중에는 북한이 중국에 수출한 상품이 한국으로 재수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정부는 단순 경유한 북한산 물품에는 무관세를, 수입 통관된 북한산 물품에는 과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각각의 증빙 서류가 제공돼야만 과세 적용이 올바르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 협조에 소극적이었던 중국은 수교를 맺은 상황인 만큼 소통 창구를 서서히 열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북한산 물품에 대한 수입 통관 때는 △진구화물보관단 △화물진구증명서 등이 발급되고, 단순 경유일 땐 △과경화물보관단 △외국화물전운추단 등이 발급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산으로 위장한 중국산 물품 반입에 대처할 수 있는 첫발을 뗀 셈이었다.

js8814@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