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을 함락하며 베트남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다. 당시 주월남대사관 김창근 서기관은 직원들과 교민들을 이끌고 탈출 작전에 나선다. 10일 간의 다사다난했던 탈출기는 다행히 성공으로 매듭지어진다. 김창근 서기관은 이후 외무부(외교부) 장관에게 탈출 과정을 수기로 보고하며 "주월 대사관 직원 동태 등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행동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숨김없이 정직하게 기록했다"고 밝혔다. 당시 이야기를 김창근 서기관의 시점에서 재구성한다.
1975년 3월 초순. 북베트남의 춘계 대공세가 시작됐다. 주요 도시가 연이어 함락됐다. 한 달은 거뜬할 것 같았던 다낭도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4월 8일 월남 공군 중위가 돌연 월남 독립궁(대통령궁)을 폭격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철수 검토 논의를 시작했다. 미국 대사관에 철수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다행히 미국 대사관은 자신들의 철수 계획에 이를 반영하겠다고 했다. 철수 작전 시 집합 장소를 전달받았다. 작전 시작일은 미국 FM 라디오 방송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올 때였다.
철수대책본부장을 임명했다. 이제 철수는 시간문제였다. 주요 문서를 챙기고 기밀 문서는 파기했다. 외무부에서 직원의 단계적 철수 계획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내부 동요가 발생했다. 누구는 먼저 가고 누구는 나중에 간다는 불만이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기로 했다. 주변 고위직에게도 '먼저 보내달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말자'고 당부했다. 그럼에도 주변 국가에 체류 중인 자기 식구들을 불러 함께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민 한 명이라도 더 보내야 할 판국에 참 여유작작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우리 해군 전차양륙함(LST·Landing Ship Tank) 두 척이 현지에 도착했다. 교민들을 대사관 정원에 모이게 했고 차례대로 LST에 옮겨 실었다. 부두에 잠시 들렀는데 LST에 커다란 짐짝들이 보였다. 대사관 직원들의 짐이었다. 화가 났다.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실어 보내야 할 판에 개인 짐을 싣는다니. 성질이 나서 나는 내일 당장 비행기로 돌아가 버리겠다고 했다. 대사가 나를 불러 달랬다.
4월 28일 미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항공기 한 대를 보내 줄 테니 철수하라고 했다. 라디오에서는 아직 캐럴이 나오지 않았다. 사태가 긴박한 듯했다. 대사관에 남아 있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 직원들에게 떠날 채비를 하자고 일렀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에서 사정이 있다며 항공기를 내일 보내준다고 했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대사관 직원들은 차라리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자고 했다. 달리 방도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떤선녓 국제공항이 폭격으로 폐쇄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선 오늘 밤은 한데 모여 관저에 묵기로 했다.
4월 29일 미국 대사관에서 '포인트 3'으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장소로 향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도 함께 모였다. 다수의 미국인도 이곳에 있었다. 미국 대사관은 오후 1시경 미국인을 LINE-A에 세웠다. 우리는 오후 3시경에 LINE-B에 위치했다. 이때부터 헬리콥터가 1시간 간격으로 철수 작전을 시작했다. 작전은 오후 8시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그때 문제가 생겼다. 미국 측에서 "왜 포인트 3이 아닌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미국인 우선 철수는 맞지만 한국인을 먼저 철수시킬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22시를 넘어섰다. 그때 안면이 있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직원들이 보였다. 이들을 붙잡고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CIA 직원들은 미국인들이 서 있던 LINE-A 중간에 우리가 설 수 있도록 해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 해병대원들이 돌연 우리를 총으로 위협했다. 나는 "미국 대사관이 우리를 철수 시켜준다고 해서 온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들은 "떠들면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결국 다시 뒤편으로 쫓겨났다.
새벽 3시경 헬리포트가 열렸다. 이제 우리 대사관 직원과 교민 차례였다. 새벽 5시경 미 해병대원 수십 명이 헬리포트에 모여들더니 미국 대사관 건물을 등진 채 우리 쪽으로 총부리를 겨눴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대사관 쪽으로 뒷걸음치는 것 아닌가. 갑자기 눈이 따가워졌다. 눈물이 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미 해병대원들이 최루탄을 쏜 것이다. 도망치려 했지만 출입문이 모두 잠겨 있었다. 주변에 드럼통이 보여 대사관 담으로 굴려 세웠다. 이후 드럼통을 밟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차해 둔 차가 보였다. 키를 꼽고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차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살펴보니 모든 차량 부품이 빠져 있었다. 전쟁통인 탓에 약탈당한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막막했다. 가까운 불란서(프랑스) 대사관으로 향했다.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대사관으로 복귀했다. 대책을 세우려던 찰나에 신부 차림의 서양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인 신문기자라는 그는 우리를 도와주고 싶다며 불란서 영사관으로 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불란서 영사관 역시 우리를 거절하긴 매한가지였다.
가까운 일본 대사관에 들렀다. 하지만 이곳 역시 자신들도 힘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본에서 항공기가 올 예정이었지만 공항 폐쇄로 도착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 측의 철수 지원도 거절당했다고 한다. 혹시 휘발유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휘발유 50ℓ를 지원받았다.
이번엔 월남 해군 기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해군 참모총장과 이야기를 나눠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여지없이 거부당했다.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가려던 그때, 한식당 '지미의 집'을 운영하고 있던 불란서인 보네를 만났다. 보네는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불란서 대사관으로 다시 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거절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보네는 근처 불란서 병원(Grall hospital)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 의사가 나왔다. 그는 물 한 병과 담배를 건넸다. 직원들과 교민들을 위해 물과 빵을 구입하고자 했다. 병원 측은 돈을 받지 않고 빵을 무상으로 나눠줬다. 병원으로 안내해 준 보네에게 기존 수고료 500달러에 돈을 더 주려고 했다. 보네는 거절했다. 대신 일이 잘 풀리면 훈장이나 하나 달라고 했다. 한시름 놓는가 싶었지만 갑자기 한 의사가 다가와 몸을 숨기라고 알려줬다. 북베트남군이 벌써 당도했다는 것이다. 병원 정문 쪽을 바라봤다. 커다란 북베트남군 깃발과 한 무리의 군인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절망스러웠다.
☞<중>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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