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김세정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불참을 두고 정치권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7일 진행된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야당의 망신 주기' 때문에 시정연설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부적절한 해명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일 국회에서 열린 2025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정연설은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을 설명하는 자리로 예산 편성 이유와 정부의 정책을 소개한다. 대통령의 전반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생각이나 구상을 가늠할 자리가 되기도 한다. 개원이나 추가 경정 예산, 주요 현안으로 국회의 동의를 구할 때도 종종 국회를 찾아 연설을 한다.
◆ 취임 첫해만 참석, 다음해부턴 총리 대독…관행 깬 건 박근혜
통상 시정연설은 10~11월경 진행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까지 보통 취임 첫해에만 대통령이 직접 시정연설을 했다. 첫해 이후부턴 국무총리가 대독해 왔다. 1988년 10월 4일 노태우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연설한 게 이같은 관행의 시초라고 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13일 2004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했고, 이듬해 10월 25일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대신 연설문을 읽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10월 27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단합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시정연설을 했다. 이듬해인 2009년 10월에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요청에 따라 이 전 대통령이 국회를 직접 찾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대독으로 진행됐다.
총리 대독 관행이 깨진 건 박근혜 전 대통령 때다. 취임 첫해인 2013년 11월 18일 국회를 찾은 박 대통령은 "국회를 존중하기 위해 앞으로 매년 정기국회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며 의원 여러분들의 협조를 구하는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가겠다"고 시정연설에서 밝혔다. 약속대로 그는 2014년 10월 29일 직접 국회를 찾아 공무원 연금개혁이 연말 내 마무리될 수 있도록 국회의 협조를 당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2016년 10월 24일에도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다. 4년 연속 국회 시정연설에 대통령이 나온 기록이다. 박 전 대통령은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개헌이라는 카드를 꺼냈으나 두 달 후 끝내 탄핵소추안이 발의됐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후 2017년 5월 치러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그해 추경 예산안을 위한 시정연설에 나섰다. 취임 첫해인 만큼 그해 11월 1일 진행된 2018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도 나왔다. 이후 임기 마지막까지 5년 연속 국회를 찾아 시정연설을 했다. 5회 연속 대통령이 국회를 찾은 건 문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 尹 "야당이 악수도 거부하고, 야유"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5월 추경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은 데 이어 관행에 따라 같은 해 10월 25일 2023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했다. 이어 2023년 10월 31일에도 국회를 찾았다. 사전환담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도 만났고, 물가와 민생을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4일 시정연설은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야당의 태도 때문에 국회를 찾지 않았다고 밝혔다. 7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시정연설을 취임 첫해에 갔는데 국회에서 더 많은 의석을 구성하는 정당(민주당)에서 로텐더홀에서 피켓 시위하면서 본회의장에 안 들어와서, 반쪽도 안 되는 의원들 앞에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두 번째엔 다 들어오니까 오라고 해서 갔는데 돌아앉아 있고, 박수 한두 번만 쳐주면 되는 건데 악수도 거부하고 야유도 하고 '대통령 그만두지 왜 여기 왔냐'는 사람부터 이건 아닌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탄핵소추는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람들한테만 하는 건데 남발하고, 수도 없이 특검법, 동행명령권을 남발하고 있다. 국회에 오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제가 안 간 것"이라며 "이렇게 하면서 국회에 오라는 것은 '대통령 망신을 좀 줘야겠으니 국민들 보는 앞에 와서 무릎 꿇고 망신 좀 당하라' 이러는 건 정치를 살리자는 얘기가 아니라 정치를 죽이자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다만 내년에는 가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윤 대통령이 밝힌 대로 야당이 국회를 찾은 윤 대통령을 향해 거세게 항의한 건 맞다. 2022년 10월 윤 대통령이 찾았을 때 21대 국회에서 원내 1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시정연설을 보이콧하기로 했다. 이재명 대표를 겨냥한 검찰 수사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의원들은 로텐더홀에서 "국회무시 사과하라" 등의 손팻말을 든 채 윤 대통령을 맞이했다. 야당 의원들이 로텐더홀에서 항의하느라 본회의장 전체 의석 중 절반 이상이 빈 자리로 있던 상태에서 시정연설이 시작되기도 했다. 당시 시정연설은 18분 28초로 역대 최단 시간이었는데 여당인 국민의힘으로부터 총 19차례 박수를 받았다.
2023년에도 민주당 의원들은 '민생경제 우선' '국정기조 전환' '국민을 두려워하라' 등의 손팻말로 윤 대통령을 맞이했다. 국회 회의장에서 상대방을 향해 고성과 야유를 하지 않기로 여야 원내대표가 신사협정을 맺었지만 로텐더홀은 회의장 밖이라는 이유로 민주당은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윤 대통령이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가자 민주당 의원들은 "여기 한 번 보세요" 등의 말을 외쳤다.
본회의장에 들어서서 윤 대통령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하는 의원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쳐다보지 않고 등을 돌리거나 악수를 거부했다. 김용민 의원은 "이제 그만두셔야죠"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협정에 따라 연설 동안 고성이나 야유는 없었다. 다만 강성희 전 진보당 의원 등이 손팻말을 들어보이기도 했다.
◆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모두…野 항의 마찬가지
그러나 윤 대통령만 이런 냉담한 상황을 맞이했던 건 아니다. 참여정부 때인 2003년 국민참여통합신당(후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기립박수로 국회를 찾은 노 전 대통령을 맞이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외면했다. 연설 때 박수도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냉대를 받긴 마찬가지였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 의원들은 일어나긴 했지만 박수는 치지 않았고, 악수를 할 때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민노당 의원들은 항의성 손팻말을 들어 보이다가 본회의장을 함께 나갔다.
관행을 깬 박근혜 전 대통령도 야당의 냉대를 맞이했다. 2014년 10월 취임 후 두 번째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 전 대통령을 환영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있었다. 일부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27차례나 박수를 치며 박 전 대통령을 호응했지만 야당은 조용히 있었다.
역사교과서 논란이 한창이던 2015년 10월 27일 시정연설에선 야당 의원들은 '국정교과서 반대'라는 팻말을 부착하고 박 전 대통령을 맞이했다. 야당 의원들의 항의로 시정연설이 지연되기도 했다. 정의화 전 의장이 "예의가 아니다. 끝나고 해 달라"며 부착물을 떼는 걸 당부하기도 했다. 일부 의원들은 연설 도중 퇴장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2016년에는 '나와라 최순실' '백남기 농민 부검 대신 사과'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임기 내내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고, 또 여대야소 상황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환영만 받진 않았다. 2017년 11월 시정연설 때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검은색 상복 차림으로 문 전 대통령을 맞았다. 가슴에는 근조 리본을 달았다. '민주주의 유린, 방송장악 저지' 등의 팻말을 모니터 앞에 걸었다. 2019년 시정연설에서 문 전 대통령이 '공수처법' 통과를 언급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팔로 X자를 그리며 강하게 반발했다. 2020년에도 국민의힘은 '이게 나라냐' '나라가 왜 이래'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걸고 항의했다.
◆ 與서도 '황당'…野 중진 "돌 맞아도 가겠다더니"
김용민 민주당 원내정책수석부대표는 시정연설과 관련된 윤 대통령의 발언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7일 민주당 지도부의 윤 대통령 간담회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야당은 들어오지 않고 국회 절반이 비었다는데 그렇지 않다. 피켓 시위 직후에 들어갔다. 야유하지 않고, 끝까지 조용히 잘 들었다. 뒤돌아 앉았다거나 악수를 거부했다는 건 일부 의원들이었고, 그 정도 항의 표시를 했다고 해서 국회를 못 오겠다는 건 겁쟁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시정연설은) 국민을 만나러 국회에 가는 것이지 야당 의원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발언할 때도 국민에게 내년도 예산과 살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국민한테 가야 할 대통령의 의무가 있는데 야당 때문에 못 간다면 시정연설의 취지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여당 의원들에게서도 윤 대통령의 불참이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여당 의원은 <더팩트>에 "설마 했는데 진짜로 안 올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국회 개원식과 시정연설은 해야 했다. 야당이 다소 소란스럽게 하더라도 대통령이 그걸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잘잘못은 국민께서 판단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진 의원도 통화에서 "돌을 맞아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왜 안 오는 것인가. 자기가 일을 잘했으면 박수받지 않겠나. (못하면 야당 의원들이) 항의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담화가) 기폭제가 돼 국민적 저항이 엄청나게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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