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84년 5월 14일 스리랑카 콜롬보 국제공항. 로산(24)·오바이디(17) 형제는 뉴욕발 대한항공 KAL-806편에 몸을 실었다. 미국 망명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온 이들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비행기는 김포를 경유해 무사히 뉴욕에 도착했고 형제는 감격에 젖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국 이민국은 두 형제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대한항공에 이들 형제를 다시 태우도록 했다. 당황한 대한항공은 우리 정부에 이같은 사실을 알렸고 정부는 우선 두 형제를 한국에 데려오라고 했다.
로산·오바이디 형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치러지던 1984년 미국 망명을 계획했다. 당시 전쟁은 수백만명의 대규모 난민 사태를 촉발했는데 두 형제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인접국 파키스탄으로 밀입국해 브로커에게 2400달러를 전달, 위조 여권과 미국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손에 넣었다. 이후 스리랑카 콜롬보 국제공항으로 향해 대한항공 항공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두 형제는 미국의 망명 허가를 수순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국 법무부 이민재판관은 두 형제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이민재판관은 이들이 유효한 이민 비자를 소지하지 않았고, 파키스탄 체류 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난민 수용 계획'을 신청하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 시 받게 될 박해가 불분명하다고 판시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두 형제는 패닉에 빠졌다.
그나마 위안인 점은 미국이 두 형제에게 아프가니스탄 추방을 결정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은 대한항공에 두 형제를 넘기기로 했다. 이들의 위조 여권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항공은 로산·오바이디 형제의 사연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정부는 두 형제를 한국에 데려온 뒤 이들이 처음 비행기를 탔던 스리랑카에 인계하기로 했다. 1985년 3월 29일 두 형제는 대한항공을 통해 서울에 도착했고, 3일 뒤 '한국~스리랑카~사우디아라비아~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스리랑카 콜롬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대한항공은 로산·오바이디 형제를 스리랑카 당국에 인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이들이 여권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며 입국 자체를 거절했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대한항공은 정부에 연락했고, 경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들을 보내보라는 답을 받았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미국에서 추방된 불법 입국 시도자는 받아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두 형제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형제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는 이들의 제3국 정착을 돕기로 했다. UNHCR은 주한 유엔개발계획(UNDP)과 협의해 방법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UNDP 측은 외교부와 접촉해 도움을 요청했고, 외교부는 UNDP가 두 형제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줬다. UNDP는 "한국 정부의 배려에 감사드린다"며 로산·오바이디 형제의 한국 체류 및 제3국 출발 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두 형제는 인도, 파키스탄 등 아프가니스탄 인접국을 제외한 어느 국가라도 좋으니 자신들을 보내만 달라고 호소했다. 외교부는 이탈리아 난민수용소, 이집트 난민수용소 등 두 형제를 받아줄 만한 국가를 물색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UNHCR도 제3국 물색에 최소 1개월이 소요될 것 같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국 정부는 이들을 부산 난민수용소에 입소시켜 시간을 벌기로 했다.
약 2개월 뒤 UNHCR은 서독에서 로산·오바이디 형제의 입국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정부는 주한 서독대사관 측과 면담, 두 형제의 정착이 가능한지 물었다. 서독대사관은 "본국에 이들 형제의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두 형제의 정착 여부를 서독 정부 측에 문의해 뒀다"고 답했다. 서독이 두 형제의 입국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 서독과 아프가니스탄 관계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있는 교육 기관을 지원하고 있었고, 많은 아프가니스탄인은 독일에 체류하고 있었다.
1985년 6월 13일 서독은 로산·오바이디 형제의 정착을 허가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그해 7월 8일 서독행 항공편이 준비됐다. 두 형제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전쟁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을 탈출, 망명을 꿈꾼 지 정확히 420일 만의 일이었다. 서독행 대한항공 항공기에 오른 두 형제는 "한국의 호의에 감사드린다"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이후 관련된 외교 문건이 생산되지 않는 점을 미뤄보면 두 형제는 무사히 서독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두 형제의 정체(?)를 두고는 께름칙한 면이 있다. 외교부가 작성한 이들의 신상 보고서를 살펴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병사 살해 혐의를 받고 있다'고 적시돼 있다. 반대로 또 다른 보고서에는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군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는데 형제 중 1명이 소련군에게 사살됐다고 주장한다'고 적혀 있다. 정부가 UNHCR, UNDP 등과 나눈 대화 기록을 보면 이같은 점은 언급되지 않았다.
또 두 형제는 부산 난민수용소 입소 시절 "호텔 같은 더 좋은 시설에서 지내게 해달라"며 단식 투쟁에 돌입하는 등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였다. 당시 법무부와 보사부(보건복지부)는 "아프가니스탄 형제의 불평이 다른 월남 난민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어 난민 수용소 질서를 어지럽힐까 염려된다"며 "이들의 출국 교섭을 강화해달라"고 외교부에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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