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한국인을 살해하고 본국으로 도주한 홍콩인은 국내로 송환됐을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홍콩은 폭력을 장려하는 살인 집단체인가"라며 분개했지만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콩은 속지주의 원칙을 견지했고 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홍콩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을 비롯해 인터폴과 접촉, 범인 확보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반전은 없었다.
수차례 한국을 출입하며 보따리 장사를 했던 홍콩인 A와 B는 암달러상 한국인 C와 안면을 텄다. 이들은 C가 상당히 많은 달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가게를 털기로 공모했다. 1984년 7월 18일 A와 B는 흉기를 소지한 채 C의 가게로 침입했고, C의 반항이 거세지자 그를 살해한 뒤 도주했다.
범행 과정에서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은 A는 호텔로 돌아가 피묻은 옷을 갈아입고 B와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이들은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탑승 수속을 따로 밟기로 했다. 체크인을 마친 A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B가 보이지 않았다. A는 B가 검거된 것을 직감, 그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홍콩으로 떠났다. 실제로 B는 경찰에 붙잡혀 있었다.
다행히 A 역시 홍콩 공항에서 현지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한국인을 살해한 A의 국내 송환은 수순인 듯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당시 한국과 홍콩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홍콩이 A를 한국에 인도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홍콩은 '외국에서 행한 자국민의 범죄는 권할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속지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홍콩이 A를 소추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정부는 "A가 처벌받지 않는다면 비슷한 범죄 행위가 발생할 위험이 높아질뿐 아니라 양국 간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과거 홍콩이 요청했던 협조를 우리 정부가 받아들인 점을 기억해달라"고 덧붙였다.
앞서 홍콩은 자국 내에서 발생한 '말레이시아 은행 직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한국인의 현지 법정 출두를 요청한 바 있다. 이때 홍콩은 "유사 사건 발생 시 상응하는 협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고 정부는 이를 감안해 한국인을 홍콩 법정에 세웠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번에는 홍콩이 국내 사건에 협조할 차례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홍콩은 A를 '살인예비 음모죄'로 구속했다. 속지주의 원칙을 따르지만 자국 내에서 범죄를 모의했을 경우 국내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홍콩은 경찰 내 특별반을 꾸려 한국에 필요한 조치를 다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홍콩은 '영장 없이 48시간 이상 억류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우리 측에 A와 관련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했다. 정부는 경찰 수사관을 홍콩으로 급파, 범행에 사용된 흉기와 혈흔이 묻은 옷 등을 홍콩 측과 공유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홍콩은 A의 한국 송환이 불가능할 것 같다며 난색을 표했다. 양국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점을 간과하기 어렵고, A가 당초 홍콩 당국에 자백한 범죄 모의 사실을 번복해 추가 증거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결국 구속 기간이 만료되고 A가 보석을 신청을 한다면 석방은 불가피한 셈이었다. 정부는 "우리 국민이 경악하고 있는 사건"이라며 "사건 처리 결과는 상호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한국에서 처벌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상황이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정부는 홍콩을 점령 중이던 영국과 접촉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영국 역시 한국과 홍콩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는 데다, 속지주의를 따르는 홍콩 법률상 처벌 규정이 부재해 긍정적인 검토가 어렵다고 밝혔다. 설령 영국 당국이 A를 기소하더라도 충분한 서면 증거가 필요하고 재판 시 증인이 출두해야 했다. 당시 A가 구속 기간 만료를 앞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A는 1984년 7월 26일 보석 신청에 따라 석방됐다. 사건 발생 약 일주일 만이었다. A가 풀려났다는 소식은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전해졌고, 곧 전두환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다. 전 대통령은 "암달러 상인 살인범 홍콩인을 홍콩경찰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한다는 아침 뉴스가 있는데, 홍콩은 폭력을 장려하는 살인 집단체인가? 여하한 경우라도 테러와 폭력, 살인은 제재돼야 할 것 아닌가"라며 "외무부(외교부) 중심 대책을 강구하고 홍콩 당국에 강력히 요구함은 물론, 관계국과도 협조할 것"이라고 친필 지시를 내렸다.
이에 외무부와 법무부, 내무부(행정안전부), 안기부가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A의 한국 송환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수렴할 뿐이었다. 결국 홍콩과 영국을 최대한 설득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외무부는 영국에 "참고로 금번 사건에 관해 대통령 각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참조사항과 더불어 홍콩으로 하여금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뿐 아니라 홍콩에서도 범죄인 인도 조약 미체결과 속지주의를 이유로 "도와줄 수 없다"는 답이 재차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홍콩에서는 "홍콩 검찰 당국이 검토한 결과, 외국에서 행한 범죄를 홍콩에서 사전 모의했더라도 A가 홍콩의 이익과 직접 관련됐거나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면 홍콩 법원이 관할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결국 홍콩에서 A가 받았던 '살인예비 음모죄'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폴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인터폴 총회가 룩셈부르크에서 열리는데 A 관련 사건이 회의 안건으로 상정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인터폴 관계자는 A 사건의 중대함을 인식, 긴급 안건으로 이를 회의에 부쳤다. 또한 인터폴 경찰업무 담당자는 해당 사건을 전 인터폴 회원국에게 경고장(RED NOTES) 형식으로 발송했다. 하지만 A에 대한 송환 절차까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외교부의 관련 문건은 A의 공범이자 국내에서 붙잡힌 B가 사형을 구형 받았다는 언론 보도를 끝으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도주범 A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걸맞은 마땅한 벌을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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