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0년 노태우 정부는 대북 정보 수집을 위해 일본 내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뒤를 집요하게 밟았다. 당시는 북한 인사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들어와 조총련과 자유롭게 왕래하던 때였다. 일본과 공조해 관련 정보를 확보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사실상 불가능했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대북 정보력 강화 차원에서 일본에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조총련 관련 대북 정보 수집은 주요코하마, 주니가타, 주오사카, 주후쿠오카 총영사관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총영사관은 북한 선박의 입출항 기록, 북한 왕래 인사의 국적, 선적된 화물의 종류, 선원 인적사항 등을 1년간 상세히 보고했다. 심지어 현장에 잠입해 38장의 사진을 촬영, 일본에 입항한 북한 선박과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조총련 인사들을 포착하기도 했다.
1990년 1월 25일 주니가타 총영사관은 북한 선박의 입출항 기록과 방북 인사들의 국적을 외교부 장관에 보고했다. 이후 북한 만경봉호와 삼지연호의 1년 치 일본 입출항 기록을 입수해 첨부했다.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1989년 만경봉호와 삼지연호를 통한 방북자는 6468명, 방북 후 일본으로 돌아온 인원은 5421명이었다. 이 중 국적이 조선적(朝鮮籍)으로 분류된 이들이 각각 5589명(86.41%), 4642명(85.62%)으로 대부분이었다.
노태우 정부가 조총련을 대북 정보 수집 창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선적은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 가운데 한국 또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들을 뜻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적 대다수가 조총련에서 활동했다. 조총련을 추적해 북한을 왕래하는 조선적과 닿을 수 있다면 대북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실제로 조총련에서는 북한 선박이 입항할 때마다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했다. 주오사카, 주후쿠오카 영사관은 행사의 규모, 참석 인원부터 특이 동향까지 수집했다. 1990년 4월 3일 주오사카 총영사관은 북한 삼지연호가 입항하자 조총련 각급 학생 500명과 관계자 300명 등 모두 800명이 환영 집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당시 북한 국적 선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화환이 건네지기도 했다.
1990년 8월 3일 주후쿠오카 영사관은 삼지연호가 일본에서 북한으로 돌아갈 때 중고 텔레비전(TV) 등 화물 1400여점이 선적됐다고 보고했다. 또한 두 차례의 선상 파티가 개최됐는데 일본인 사회당 정치인 등 180명과 조총련 각 조직 간부 230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한 조총련 조선학교 학생들과 조선적 교포 1300명이 배 안으로 들어가 견학을 했다고도 덧붙였다.
당시 주후쿠오카 영사관은 삼지연호가 일본에 입항하고 출항할 때 모습을 사진으로 확보했다. 사진의 각도 등을 고려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진은 1990년에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화질이 좋았다. 촬영된 사진에는 삼지연호의 모습과 인공기, 북한과 조총련 인사들부터 선박에 적재된 차량 등 화물이 확인됐다.
일본 주재 총영사관들의 보고는 1991년 1월 23일 주니가타 총영사관의 '1990년 만경봉호 및 삼지연호 방북자 현황' 보고를 끝으로 더는 생산되지 않았다. 외교 전문에 특별한 대북 정보가 담기지 않은 점을 미뤄보면 조총련을 통한 정보 수집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 정부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 과정에서 꽤 가치 있는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주오사카 총영사관은 1990년 6월 9일 북한 공작선 '동건 애국호'가 수리 목적으로 오사카 입항 수속을 마쳤다고 보고했다. 또한 해당 공작선이 노태우 대통령 방일 기간에 맞춰 입항을 시도하려다가 일본 측에 가로막혔다고 전했다. 동건 애국호는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당시 미얀마에 도착할 수 있도록 그를 선원으로 가장해 태워준 선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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