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더위와 싸우는 노동자들…'폭염 입법' 추진될까


올해 온열질환자 995명…실외작업장만 292명
'온열질환 예방가이드'있지만…권고에 머물러
22대 국회서 다수 법안 발의

장마가 끝나자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7월까지 발생한 온열질환자만 1000여 명에 달할 정도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일하는 근로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더팩트 DB

[더팩트ㅣ국회=김세정 기자] 장마가 끝나자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7월까지 발생한 온열질환자만 1000여 명에 달할 정도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일하는 현장 노동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무더운 시간대엔 야외 작업을 피해야 하지만 권고사항일 뿐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더위가 계속되는데도 정치권은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법적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상청에 따르면 2일 낮 최고기온은 30~37도로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됐다. 지난달 27일 장마가 사실상 종료된 이후 시작된 불볕더위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고온에 장시간 노출될 경우 두통이나 어지럼증, 근육경련, 피로감, 의식 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열사병과 열탈진 등의 온열질환이 생길 수 있다.

폭염이 계속되면서 온열질환자도 속출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가 운영된 5월 20일부터 7월 31일까지 신고된 온열질환자는 995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4% 늘어났다. 추정 사망자는 4명이다.

구체적으로 실외작업장과 논밭에서 각각 292명(29.3%)과 180명(18.1%)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해 전체 신고 환자의 절반에 가까웠다. 또 비닐하우스에서도 20명, 실내작업장에서도 70명이 온열질환을 호소했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통계에서도 40.2%의 온열질환은 실외작업장 및 논밭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기상청이나 질병관리청은 가장 무더운 낮부터 오후 시간대엔 야외작업을 자제하고, 작업 시엔 충분한 휴식을 권고한다.

◆ 폭염 대비 노동부 가이드 있지만…강제성 없어

고용노동부는 폭염으로 인한 근로자의 온열질환을 예방할 수 있도록 '온열질환 예방가이드'를 배포했다. 올해 5월 22일 배포된 자료를 살펴보면 체감온도 31도 이상의 더위가 지속될 경우 사업장은 근로자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 그늘 또는 휴식공간을 마련하고, 근로자들이 규칙적으로 수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시원한 물을 충분히 준비해 둬야 한다.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이거나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경우엔 매시간 10분씩 휴식을 제공하고, 오후 2~5시에는 야외작업을 단축하거나 작업시간대를 조정하도록 한다. 또 체감온도가 35도 이상 또는 폭염경보일 경우엔 매시간 15분씩 휴식을 제공하고, 오후 2~5시에는 불가피한 경우에는 옥외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예방가이드는 말 그대로 권고사항일 뿐 법적 구속력이 없어 유명무실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도 근로자가 고열 작업을 하는 경우 휴식과 그늘진 휴게시설을 제공해야 한다고 돼 있는데 기준이 모호하고, 실질적 구속력은 없어 근로자들은 폭염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용노동부는 폭염으로 인한 근로자의 온열질환을 예방할 수 있도록 온열질환 예방가이드를 배포했다. /더팩트 DB

"갈수록 더워지지만 죽도록 일만 한다." "이러다 다 죽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에서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순간순간 넘나들며 견뎌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바꿔낼 건인가."

"폭염에 쓰러져야 조치를 취하는 현실에도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목숨 걸고 일할 수밖에 없는 게 비참하다."

민주노총 건설노동조합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건설노동자들은 이같은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지난달 27∼28일 건설노동자 157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온열질환 예방가이드 대로 폭염특보가 발령될 경우 매시간 10~15분의 규칙적인 휴식을 취하는 건설노동자들은 18.5%에 불과했다. 폭염경보가 발령되면 오후 2~5시 옥외작업을 중지하도록 돼있지만 80.6%는 별도의 중단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쫓겨날까 봐, 또는 작업중지를 요청해 봐야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아무리 더워도 요청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택배노동자의 경우도 폭염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한다. 지난달 25일 열린 폭염 속 노동실태 및 제도개선 국회토론회에서 전국택배노조 소속 권순규 씨는 "택배노동자의 차량 이동 거리는 길면 1분 짧으면 30초다. 뜨거워진 차량이 식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라 에어컨도 무용지물이다. 폭염 속에서 고강도 노동을 하고 나면 일하는 날은 들어가자마자 씻고 자고 눈뜨자마자 일을 하는 것의 반복"이라고 밝혔다.

급식실이나 물류센터 등 실내에서 일하는 작업자도 극한의 환경에 노출돼 있긴 마찬가지다.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 소속의 신명희 조리사는 "200도 안팎의 기름, 밥 짓는 열기와 수증기 등으로 인해 사우나실과 다름없는 열악한 작업환경도 버거운데, 조리인력 부족으로 인한 과도한 업무강도가 더해지면 한여름 무더위는 살인적인 폭염이 되곤 한다"며 "조리실의 온도가 50도까지 올라가는 찜통환경에서 조리복, 화상방지 비닐 앞치마와 장화 착용으로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채 근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근로자들은 폭염에 대한 대비책이 권고에 그칠 게 아니라 법적인 강제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임영무 기자

◆ "폭염 휴식 강제력 갖추도록 입법 추진해야"

근로자들은 폭염에 대한 대비책이 권고에 그칠 게 아니라 법적인 강제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박세중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더팩트>에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은 현장에서 지켜야 될 안전보건에 관한 규정이 많기 때문에 규칙을 나열해 놓은 것이어서 (법적 구속력은 없다) 매년 폭염 때문에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데 법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권고로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건설노동자의 설문조사와 같이 사업주의 손익 계산, 고용의 불안정 등의 이유로 작업중지권이나 휴식을 요청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상태인데 이를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통화에서 "작업중지권이라는 것은 생산에 큰 차질을 주기 때문에 개인 노동자가 용기 내서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 노동자의 권한을 확실히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이 법안에 들어가 있거나 시행령에 제시돼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 "폭염에 작업중지권 의무화"…다수 법안 발의

22대 국회에는 폭염 속 노동자의 건강권과 관련된 법안이 다수 발의 돼있다.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근로자가 폭염이나 한파, 황사 속에서 계속 근무해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예상될 때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지난달 31일 대표 발의했다. 노동부도 사업주에게 작업중지를 명할 수 있도록 했고, 작업중지로 인한 임금이 깎이는 것은 국가나 지자체가 지원하도록 해 실효성을 확보하는 내용도 담겼다.

22대 국회에는 폭염 속 노동자의 건강권과 관련된 법안이 다수 발의 돼있다. /남용희 기자

강득구 민주당 의원도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규정한 작업중지권의 범위에 폭염과 한파, 태풍의 기상 이변을 포함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도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에 부과된 보건조치 의무에 폭염과 한파에 포함시키는 법안을 발의했다.

박정 민주당 의원도 폭염과 한파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예방조치를 사업주에 부과하고, 사업주는 업무 일시 중단이나 휴게시간 확대를 실시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사업주는 근로자가 작업중지를 요청하더라도 해고하거나 불리한 조치를 해선 안 되며 작업중지로 인해 비용 손실이 발생할 경우엔 관련 비용을 국가가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발의된 법안은 모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회부돼 있다.

이병훈 명예교수는 "누구나 생명이나 안전에 위해가 있다고 판단되면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로서 보장이 되고, 권리를 제한할 경우 어떤 제재나 처벌이 주어진다는 것이 법으로 확실하게 된다면 현실이 바뀔 텐데 사용자, 즉 기업의 반론이 클 것"이라며 " 입법 자체가 힘들어지거나 논쟁을 거치며 입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시행령이나 규칙으로 조금 더 세부적으로 명시하는 노력이 된다면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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