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박숙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총선 이후 출범한 여당 지도부와 만찬을 갖고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총선 이후 당 안팎에서 '수평적 당정 관계' 정립 요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3년 남은 집권 기간 국정운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당 장악력을 온전히 배제할 수 없어 윤 대통령이 당정 관계 재설정을 두고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과 추경호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지도부와 이날 저녁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상견례를 겸한 만찬을 했다. 이날 자리에는 황 위원장과 추 원내대표를 비롯해 정점식 정책위의장, 엄태영·유상범·전주혜·김용태 비대위원, 성일종 사무총장, 배준영 원내수석부대표, 조은희 비상대책위원장 비서실장이, 대통령실에서는 정진석 비서실장, 홍철호 정무수석이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당정 간 협력 강화에 뜻을 모았다.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오늘 만찬은 총선 이후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은 당 지도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마련했다"며 "국민의힘 비대위가 공식 출범하자마자 곧바로 대통령 초청으로 만찬을 개최한 것은 국정 현안, 특히 민생 현안이 산적해 있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여당의 적극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 당정이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만찬 내내 당 지도부의 의견을 경청했다"며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잘 새겨서 국정운영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황 비대위원장은 "전당대회 준비 등 당 현안을 차질 없이 챙기는 한편,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당정 간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고 김 대변인이 전했다.
윤 대통령은 황우여 비대위·추경호 원내지도부와 긴밀히 소통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 지도부는 당장 국회로 돌아올 '채상병 특검법'을 처리부터 난제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기자회견을 통해 직접 채상병 특검법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방침을 시사했고, 검토 기간을 거쳐 오는 22일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전망이다. 채상병 특검법이 재의결 되려면 재적의원(295명) 과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197명)해야 한다. 재적의원이 모두 출석한다는 가정하에 범여권 중 17표 이상 이탈표가 나오면 가결되는 것이다. 안철수·김웅·이상민·조경태 의원 등 일부 여당 의원들은 채상병 특검법에 찬성 의사를 밝힌 상태이고, 불출마하거나 낙천·낙선 의원들(55명)들이 당론 대신 소신 투표할 가능성이 있다. 단일대오를 형성해 '채상병 특검법' 이탈표를 단속하는 것이 황우여 비대위와 추경호 원내지도부의 첫 과제인 것이다. 채상병 특검법이 재의결될 경우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윤 대통령의 리더십 타격은 불가피하다.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룰을 두고도 당정은 긴밀히 의견을 교환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8월초가 유력하다. 특히 '당원 100% 전당대회' 룰을 손봐야 한다는 게 당 안팎 중론이다. 대통령실이 전당대회를 어떻게 접근할지 주목할 점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지도부 선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취임 후 두달여 만에 이준석 전 대표가 당 윤리위원회 징계로 당대표직을 잃었고, 윤 대통령이 권성동 원내대표에게 "내부 총질이나 하던 (이준석)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며 이 전 대표에 대한 당의 중징계 결정에 개입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후 지난해 3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윤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당원 100% 룰'과 결선투표제 도입이 결정됐다. 출마를 고심하던 나경원 전 의원에 대해선 윤 대통령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하자 사실상 불출마를 압박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나 전 의원은 출마 의지를 접었고 '친윤' 김기현 의원이 선출됐다.
여당은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완패한 이후 혁신위를 꾸렸지만 수직적 당정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윤 대통령과 '20년 지기'였던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비상대책위원장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한 전 비대위원장 역시 당정 갈등을 겪었고 대통령실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총선 국면 내내 대통령실이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 부각되면서 총선에서 참패했다. 대통령실이 여당에 지나치게 관여했고 여당은 대통령실 눈치 보는 데 급급해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자성이 당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윤 대통령은 새 비서실장에 정진석 전 비대위원장을 기용하는 등 현재까지 여당에 대한 고삐를 놓지 않은 모습이다. 22대 국회 개원 직후에도 채상병 특검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 특검 정국이 예고된 상태이고, 범야권이 192석을 차지하면서 여소야대 지형은 더 쏠렸다. 국정운영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 여당 장악력도 무시할 수만은 없는 딜레마에 놓인 셈이다.
윤 대통령이 여당과 협력하되, 수평적 당정관계를 확실하게 재설정해야 하는 난제를 안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윤 대통령이 지나칠 정도로 당을 장약해 친윤당으로 만드는 바람에 국민의힘이 국회에서 존재감이 없었고 총선 때 후폭풍을 맞았다"며 "그래서 이제 대통령은 국정만 챙기고 정치 무대에서 한발 물러나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대통령이 총선 이전처럼 당을 장악하려는 순간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빠져나갈 것"이라며 "긴장과 협력관계를 기본으로 정립하되, 당이 전면에 나서고 대통령실은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당도 살고 대통령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권 관계자는 "지난 총선 패인 중 하나가 수직적인 당정 관계였다. 당이 대통령실에 끌려다니면서 민심이 제대로 대통령실에 전달이 안 됐던 것"이라며 "(앞으로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대통령과 여당 대표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협의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당대표로 누가 선출되느냐가 향후 당정 관계 재수립에서 관건이 될 전망이다. 당권주자로는 5선 고지에 오른 나경원 당선인과 권성동·권영세·윤상현 의원, 안철수 의원 등이 거론된다. 유승민 전 의원 출마 가능성도 있다. 한 전 위원장의 출마 여부도 주목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비대위원장직 사퇴 종용설'에 대해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는 풀었다"며 "(한 전 위원장이) 앞으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잘 걸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여권 관계자는 "(차기 여당 대표는) 대통령과의 협조적인 관계 속에서 당 목소리를 이전보다 대변하는 식이 될 텐데, 한 전 위원장이 당대표가 될 경우엔 (당정 관계가 어떻게 될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