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 vol.2-②] 집 앞까지 찾아가는 일본…멀어서 포기하는 한국


노년, 장애인 교통 약자 위한 제도 마련 목소리
美·日 모두 유권자 찾아가...21대 국회 공직선거법 개정안 '계류'

초고령화 진입을 앞둔 우리나라는 저출생뿐 아니라 수도권 과밀화에 따른 지역인구소멸 문제를 안고 있다. 지역간, 세대간 불균형·불평등을 초래하는 이런 심각한 사회적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불행스럽게도 지난 제22대 선거 국면에서도 지역간 불등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서조차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에 정보와 이동의 불균형이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더팩트>는 4·10 총선 보도기획 [발걸음 vol.2]를 통해 대도시와 소멸위기지역의 선거 현실과 개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22대 총선 투표율은 67%로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교통약자들의 투표권 행사는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 투표일인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부기술교육원에 마련된 한남동 제3투표소를 찾은 환자가 투표를 하고 있다.

[더팩트ㅣ설상미 기자] "87세 할머니와 59세 삼촌이 경북 포항에서 같이 살고 계신다. 할머님은 치매 초기인 데다, 삼촌도 몸이 불편하셔서 이번 선거 두 분 모두 투표를 포기하셨다. 두 분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속상했다." (31세, 부산 거주 여성)

"충남 부여에 계신 92세 할머니를 모시고 10km 떨어진 투표소까지 가야 했다. 매 선거철마다 부여까지 가서 할머니를 투표소로 모시는 일이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다." (30세, 서울 거주 남성)

◆분명한 사각지대...노인을 투표소로 데려다주면 공직선거법 위반?

4·10 총선을 앞둔 지난 8일 인천 강화군 모 노인보호센터 블로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사연이 올라왔다. 사연의 주인공은 인천 강화군에 위치한 노인보호센터 대표 A 씨. 그가 이번 총선 사전투표일인 6일, 어르신들을 사전투표소까지 승합차로 데려다준 게 화근이 됐다. A 씨는 "어르신들의 안전한 투표를 위해 센터 내에 거소 투표소를 설치해달라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요청했으나 요양원이 아닌 관계로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A 씨는 "원하는 어르신들에 한해 등원 과정 중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도와드린 건데, 우리 센터가 특정 정당을 위해 어르신의 투표권을 악용하고 있는 것처럼 호도된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경찰은 A 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들여다 보고 있다. 공직선거법상 유권자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건 금지돼 있어서다. 공직선거법 제230조에 따르면 투표·당선을 목적으로 유권자를 차량에 태워 투표소까지 실어 나르는 행위는 '유권자 매수 및 이해유도죄'에 해당된다. 유권자들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기부행위'로 간주돼 처벌받을 수 있다. 다만 거동이 힘든 어르신들에게 선의로 교통 편을 제공한 건지, 매수를 목적으로 한 행위인지는 수사 당국에서 살펴봐야 한다.

사진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개표사무원들이 투표용지를 쏟는 모습. /박헌우 기자

거동이 어려운 유권자 혹은 노년 유권자들에 대한 교통편의 제공과 관련된 조항은 이미 공직선거법에 마련돼 있다. 공직선거법 6조에 따르면, 시·군·구 선거관리위원회는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 거주하는 선거인 또는 노약자·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를 위해 교통편의 제공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일 전날까지 해당 지역 선관위에 전화로 신청한 경우에는 자택에서 투표소까지 왕복구간 이동에 따른 차량 제공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경우에는 정당·후보자와 미리 협의해야 하기에 과정이 간단치 않다. 선관위 관계자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우리나라는 지역색이 강하다 보니, 특정 지역의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만 교통편을 제공하게 되면 불공정 논란에 휘말릴 수가 있어서 선관위에서 하려고 해도 특정 정당이 반대하면 못 한다"며 "그만큼 예민하게 보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투표가 어려운 교통약자들을 위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일본은 지방소멸 및 초고령화 사회 추세에 맞게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위한 차량(버스) 투표소를 2016년 참의원 선거 때부터 이를 도입, 운영하고 있다. 2022년 7월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한 노인이 이동식 버스 투표소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모습. /NHK 홈페이지 갈무리

◆일본 "찾아가는 차량 투표소 확대", 미국 "이동식 투표센터 트레일러 도입"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지방소멸 및 초고령화 사회 추세에 맞게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위한 '차량(버스) 투표소'가 운영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니케이)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지난해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서 열릴 시장 선거와 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찾아가는 차량 투표소'를 시범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지난 2020년 쓰쿠바시의 시장·시의회 선거 투표율이 51.6%로 역대 최저를 기록(80대 이상 유권자 투표율 40%)하자, 고령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년 유권자가 인터넷으로 투표 희망 장소와 시간을 지정해 예약하면, 그 시간에 맞춰 해당 장소에 찾아가는 방식이다.

일본은 2016년 참의원 선거 때부터 이를 도입, 운영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마네현 하마다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운영한 이동 사전투표소다. 10인승 버스를 개조한 것으로, 유권자 접수와 확인은 차량 밖에서 이루어졌다. 투표하는 사람만이 차량에 탑승할 수 있다. 당시 하마다시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일 4개 기존 투표소 순회를 통해 37명 정도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3일간 순회한 지역에서는 선거인 명부 등록 대상자 153인 중 68인(40%)이 이동식 사전투표소를 통해 투표했다. 시범운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2021년 중의원 선거에선 48곳의 기초단체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이동식 투표소가 운영되고 있다. 지난 3월 5일 치러진 미국 대선 예비선거를 앞두고 LA(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사상 첫 모바일 투표센터가 설치됐다. 트레일러 형태의 모바일 투표센터로, 투표기기(키오스크)들을 탑재한 대형차 안에서 투표할 수 있게끔 마련됐다. LA가 다른 주에 비해 투표소로 이용될 수 있는 학교, 주민센터 등이 부족한 것을 보완한 제도다. 이동 트레일러 투표소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유지됐다.

이외에도 호주에서는 병원, 양로원 등 노인들이 이용하기 쉬운 장소에 이동식 투표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독일은 이동투표구 선거위원회 및 특별투표구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모두 투표소나 사전투표소에 가기 어려운 교통약자를 위한 대책으로 꼽힌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8월 교통 약자를 위해 사전투표 기간 이동식 차량 투표소를 두자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21대 임기 국회 만료로 법안이 자동 폐기될 위기다. /배정한 기자

◆21대 국회 '이동식 차량 투표소' 법안 발의됐지만...'계류'

서울 등 수도권 대도시 노년 유권자보다 상대적으로 인구소멸위험지역에 해당하는 비수도권 소도시 노인 유권자는 정보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것뿐 아니라 이동에도 제약이 있다. 교통 인프라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지방 소도시의 경우, 전철은 언감생심이고, 버스의 배차 간격도 도시와 큰 차이가 있다. 청년층이 매우 드문 도서산간은 말할 것도 없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서도 지역간 유권자들이 겪는 '애로'의 편차는 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노인, 장애인 등 교통 약자들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법안 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일본, 미국의 사례처럼 '찾아가는 투표소' 설치를 향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일본학회에 실린 논문 '유권자의 투표 편의성과 일본·미국의 사전투표소'에는 유권자가 투표소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닌, 투표소가 유권자를 찾아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담겼다. 투표율 제고를 위해 유권자의 투표 참여에 드는 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1대 국회에서도 위와 같은 교통 약자를 위해 이동식 차량 투표소를 사전투표 기간에 운용하자는 취지의 법안이 지난해 8월 발의됐다. 먼 곳의 투표소나 사전투표소에 이동할 수 없는 노약자 등 교통약자의 투표율 저하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을 위해서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인천 동구미추홀구을)은 사전에 신고한 사람에 대해 거주지 등으로 차량을 이동해 투표할 수 있도록 이동식차량투표소를 도입하는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지만, 8개월째 계류 중이다. 21대 국회 임기(5월 29일)가 끝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

이와 관련해 윤 의원은 "2025년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로 선거구 통폐합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며 "먼 곳의 투표소까지 이동할 수 없는 어르신들을 위해 이동식 차량투표소를 도입해 찾아가는 투표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고 밝혔다.

snow@tf.co.kr

[관련기사]

[발걸음 vol.2-①] '참정권 사각지대'...여전한 지역간 정보 불균형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