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비상'에도 조용…물밑 대응 중인 대통령실


비상경제민생회의 지난해 11월 이후로 안 열려
대통령실 "도·소매가 정밀 분석 지시"  

과일 가격 급등 등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복귀하며 고물가 걱정이 커지고 있다. 올해 들어 윤석열 대통령의 물가 관련 언급은 줄어든 모습이다. 2월 26일 충남 서산 동부전통시장을 방문해 상인과 시민들을 향해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최근의 물가상승과 관련, 특히 서민이 민감하게 여기는 품목들의 가격 급등 현상과 관련하여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정부는 서민에게 중요한 식료품이나 생활물가 상승에 대해서도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가격이 오른 후에서야 황급히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확장재정 기조로 물가가 불안정했던 2021년 11월 15일,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SNS에 올린 글의 일부다. 과일값이 1년 만에 절반 가까이 급등하는 등 최근 고물가 우려가 커진 가운데,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물가' 관련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민감한 현안임을 고려해 직접 나서 주목을 끄는 대신 물밑에서 대책 마련에 주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민생 현장에선 '뛰어오르는 물가를 잡아달라'는 요구가 날카로워지고 있다. 물가 불안은 경제지표상에서도 나타났다.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꾸준히 하락해 지난 1월 2%대로 복귀하며 안정세에 접어든 듯했지만 한 달 만인 2월 3.1%로 반등했다. 농산물 물가가 20.9% 상승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린 것이다. 과일과 채소 등으로 구성된 신선식품지수는 20.0% 올랐다. 채소가 12.3%, 과일은 41.2% 상승했다. 특히 과일은 1991년 9월(43.9%)이후 상승 폭이 가장 컸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의 대형마트를 찾은 모습. 민주당은 물가 관리에 필요한 안정적인 국내 공급망 확보 등 대책은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는 최근 농축수산물 가격 급등의 주요 원인으로 이상기후와 집중호우, 병충해 영향 등에 따른 수확 부진과 생산비 증가를 꼽고 있다. 여당 일각에선 최근 과일 가격 급등을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탓으로 돌리고 있다.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5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문재인 정권 때 단행됐던 최저임금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농가는 인건비 상승이라고 하는 큰 충격이 발생됐고, 이 결과 농가 수익 구조가 급격하게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수익 구조 악화로 과수 재배를 포기하는 가구가 크게 늘면서 재배 가구가 급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야권은 2년 전 윤 대통령처럼 "물가 관리에 필요한 안정적인 국내 공급망 확보와 생산 기반 확충 및 농가 피해 대책은 외면하고 있다"라며 정부의 근본적인 물가 관리 대응이 미흡하다고 공세를 펼치고 있다.

여야가 서로 네 탓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대통령실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한발 물러선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024년 정부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물가와 민생 안정을 모든 정책의 최우선에 두고 총력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올해 들어 공개석상에서 '물가 관리' 언급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가도 2%대의 안정세를 되찾을 전망이다(1월 4일 첫 번째 민생토론회)", "명절 물가 관리에 만전을 기해달라(2월 5일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위해 이번달부터 전기요금을 최대 20만 원 감면해 드리고 있다(2월 6일 국무회의)"는 발언 정도다. 올해 들어 총 7곳의 지역 전통시장을 찾았지만 여기서도 물가 안정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는 없었다. '물가 점검' 등 경제 복합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출범 이후 초반부터 주재해온 '비상경제민생회의' 역시 지난해 11월 1일 '21차 회의'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 '비상경제민생회의의 현장판'인 '민생토론회'를 20차례 열었지만 지역별 산업·교통·인프라 구축 등 굵직한 지원 방안에만 집중하고 있다. 대통령실이 민생토론회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물가 점검 등 거시경제 정책 대응 역량이 분산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물가 이야기는 매일 아침 회의 때마다 나온다"라며 물가 안정 대책을 꾸준히 챙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정은 다음 주부터 긴급가격안정자금 1500억 원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15일 밝혔다. 1월 14일 제16차 고위당정협의회 모습. 왼쪽부터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 최상목 경제부총리, 한덕수 국무총리,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배정한 기자

대통령실과 정부가 물가 안정에 더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우려가 여당에서 나온다. 20여 일 앞둔 22대 총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탓이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의 가장 큰 이유로 '경제·민생·물가'가 꾸준히 꼽히고 있다. 정부의 물가정책을 옹호해오던 여당 지도부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14일 부산 북구 구포시장에서 "물가가 너무 올라 죄송스럽다. 물가 잡고 잘하겠다"고 말했고, 15일에는 전남 순천시를 찾아 "(고물가를) 정부여당이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위원장은 또 "최근 높은 농축산물 가격에 대응해서 긴급가격안정자금 1500억 원을 다음 주부터 바로 추가 투입하기로 정부와 협의했다"며 당정 협의 내용을 정부보다 먼저 발표했다. 유통업체 공급 과정에서 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농산물 납품단가 지원 규모를 기존 204억 원에서 959억 원으로 대폭 늘린다는 내용이다. 지원 대상 품목을 13개에서 배·포도 등을 추가해 21개로 확대하고 지원 단가도 1kg당 2000원에서 최대 4000원까지 인상하기로 했다. 또 한우, 한돈, 계란, 닭고기 등 축산물에 대한 할인·납품단가 지원 규모도 109억 원에서 304억 원으로 확대해 30∼50% 할인하는 행사도 늘어날 전망이다.

대통령실은 가격안정자금 지원 등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도 적극 들여다보고 있다는 입장이다. 도매가격이 하락해도 유통비용 등 구조적 문제로 인해 소비자가격에는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관계자는 "(농·축산물) 품목별로 도매가격, 소매가격, 산지 가격 차이를 정확하게 분석할 것을 지시했다"고 전했다.


unon89@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