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용산=박숙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정면충돌했다. 특히 대통령실이 한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용산의 '당무개입 논란' 파장이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22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전날(21일)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해 한 위원장의 위원장직 사퇴 요구를 전달했다. '대통령실 한동훈 지지 철회' 보도가 나온 직후 대통령실은 "비대위원장 거취 문제는 용산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한 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 출근길에서 "제가 (용산의) 사퇴 요구를 거절했다"라며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가 있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비대위원장직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한 위원장의 출근길 발언이 알려진 직후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생활규제 개혁'을 주제로 주재할 예정이었던 다섯 번째 민생토론회 일정을 취소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감기 기운이 있어 외부 공개 토론회 참석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라고 민생토론회 불참 배경을 설명했지만,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불참 결정이 한 위원장과의 충돌 때문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렸다.
한 위원장이 여당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지 약 한 달만에 용산발 '한동훈 불신임'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통령실의 당무개입 논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검찰에 있을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췄고 현 정부 출범 이후에는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돼 온 인물이다.
이번 당·정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취임 이후 윤 대통령의 잇따른 당무개입 논란도 재조명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대선 당선 직후인 2022년 3월 10일 당 선거대책본부 해단식에서 "대통령이 된 저는 모든 공무원을 지휘하는 입장이기에 당 사무와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다"며 당·정 분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윤 대통령이 당 징계를 받은 이준석 전 대표를 겨냥해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당이)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체리 따봉' 이모티콘과 함께 권성동 당시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에게 전달한 사실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여당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지난해 3·8 국민의힘 전당대회(전대) 과정에서도 용산의 당무개입 논란은 지속됐다. 국민의힘은 전대를 앞두고 당대표를 당원투표 100%로 선출한다고 전당대회 규칙을 바꿨고, 당대표 출마를 고심했던 나경원 전 의원은 대통령실과 갈등을 겪다가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됐다. 또 다른 당대표 후보였던 안철수 의원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은 이른바 '안윤(안철수·윤석열) 연대' 발언을 이례적으로 강하게 문제 삼기도 했다. 사실상 대통령실이 유력 당권주자들의 불출마를 종용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결국 국민의힘 3·8 전당대회는 '윤심'을 앞세운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가 과반 득표로 당선됐지만, 김 전 대표 역시 '총선 불출마' 등 거취 관련 압박을 받다가 당대표로 선출된 지 9개월 만에 전격 사퇴한 바 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30%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당정 갈등은 더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낮으면 총선을 앞둔 여당은 '정권 심판론'이 가동할 것을 우려해 대통령실과 거리 두기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실의 개입 논란이 반복되면 당 지도부 리더십이 흔들리면서 당내 혼란은 더 가중될 수 있다. 특히 여권에선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 간 갈등의 핵심이 공천 문제보다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의혹 대응에 대한 입장차라는 분석이 많아 당정 갈등 봉합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야권은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 논란을 정조준했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한 위원장이 대통령실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다고 본인 입으로 확인해 줬다. 이는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 정치 중립 위반으로 판단한다"며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예고했다.
대통령실은 한 위원장의 '대통령실 사퇴 요구' 발언에 대해 현재까지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관련 대응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전날(21일) 저녁에도 이관섭 비서실장 등 대통령실 고위 참모진이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과 당정 갈등 관련 대응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이전까지는 (당무 개입이) 대외적으로 표출이 안 됐는데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실에서) '한 위원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얘기한 게 사실이라면 매우 노골적인 당무 개입"이라며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현격히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친윤계가 전방위로 나서서 (한 위원장이) 도저히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번에는 손실이 상당히 클 것으로 보인다. (여권이) 한 위원장을 (보수 진영) 대안으로 띄워놨는데 갑자기 잘라내면 누구보다 보수 핵심 지지층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