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박숙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2박 4일간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APEC 데뷔 무대에서 윤 대통령은 역내 공급망 협력 강화와 기후위기 문제 극복 방안을 제시하며 글로벌 책임외교 리더십을 선보이는 데 주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일본을 비롯한 주요 동맹·우호국들과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도 구체적인 진전을 보였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이후 굳건해진 한미일 공조 관계도 첨단기술과 청정에너지 등 경제분야로 확대해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이번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 정상회담이 기대를 모았지만, 끝내 불발되면서 대중국 정상외교는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APEC서 '조기경보시스템 구축' 등 제안...IPEF에서 공급망 협력 구체화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APEC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APEC은 아태 지역 경제성장과 번영을 논의하는 지역 최대 협력체로,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21개국이 회원국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 공급망 불안정, 기후 문제 등 글로벌 복합 위기 속에 각국 정상이 모인 것이다.
윤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1차 세션에서 무탄소 에너지 활용, 친환경 이동 수단 전환, 기후 격차 해소 3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역할과 기여 방안을 설명했다. 2차 세션에서는 역내 경제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공급망 교란'을 지목하고, 조기경보시스템 구축 등 APEC 내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급망 강화 협력'에 대한 토의장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정상회의로 옮겨가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IPEF는 공급망 재편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통상 의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도해 작년 출범한 경제통상 협력체다. 중국을 제외하고 한국,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인도·태평양 지역 주요 1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미국은 올해 APEC 주최국으로, IPEF 회의도 동시에 개최해 인도·태평양 지역 주요 동맹국들과 경제협력 강화 공조를 재확인하는 한편 중국을 견제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IPEF 참여국들은 이번 회의를 통해 공급망, 청정경제, 공정경제 등 3개 분야 협력에 대해 협상을 마쳤다. 우선 내년에 '공급망 협정'이 발효되면 공급망 위기 발생 시 IPEF 14개국 고위공무원으로 구성되는 'IPEF 위기대응 네트워크'가 가동돼 대체공급처 관련 정보 공유 등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논의할 수 있게 된다. 최상목 경제수석은 전날(16일) 현지 브리핑에서 "IPEF 공급망 협정을 통해 핵심광물이나 수입 원자재의 공급망 교란요인이 발생하거나 특정국에 갑작스러운 수출통제조치가 있더라도 즉각적인 대응조치가 가능하고 공급망 취약 요소도 선제적으로 해소하는 메커니즘이 확보됐다"고 평가했다.
또 '청정경제 협정'을 통해 참여국들은 청정에너지 저장, 재생에너지, 탄소제거 등 2030년까지 1550억 불 이상의 공공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친환경 항만, 스마트 전력망 등 IPEF내 개도국의 청정인프라 개발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아울러 '공정경제 협정'도 체결해 정부조달 과정에서의 불법행위 방지 등을 약속했다. 최 수석은 "공정경제 협정이 발효되면 성장 가능성이 큰 개도국의 시장진출, 인프라, 정부조달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참여기회가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세 철폐 등을 담은 무역 분야 협상은 진행 중이라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IPEF 참여국 정상들은 내년 초 '핵심 광물 대화체(Critical Mineral Dialogue)'도 발족하기로 했다. 참여국 간에 리튬, 니켈, 등 역내 핵심 광물 자원 매장 현황을 정밀하게 파악해 공유하고 핵심 광물 관련 무역 확대에 협력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핵심 광물에 대한 특정국 의존을 낮추기 위해 광물 회수 및 재활용 관련 기술을 참여국 간에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참여국 간 핵심 광물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투자 안전장치 구축 등 투명한 투자 환경도 화하기로 했다.
◆한일 35분 정상회담, 한미일 10분 회동, 한중 3분 담소
APEC 정상회의 기간 각국 정상들과의 정상외교 활동도 눈길을 끌었다. 윤 대통령은 먼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기시다 총리와는 올해 들어 벌써 7번째 만남이다.
16일(현지시간) 약 35분간 진행된 회담에서 두 정상은 지난 8월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합의에 기반해 역내 글로벌 안보 현안 관련 한일·한미일 공조를 강화하고, 한일 미래세대 교류 확대를 위해 청년 교류협력 프로그램을 유학, 인턴십, 취업 지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다음 날 스탠퍼드대에서 좌담회와 한일 스타트업 간담회를 열며 친분을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저와 기시다 총리님은 한일 간 협력의 지평을 과학기술 분야로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며 "일본과 그동안 원만하지 않았던 관계를 다 청산했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우리의 공통점은 맛있는 식사와 술을 좋아하는 것"이라며 지난 5월 방한 당시 대통령 관저에서 '아주 멋진 한국 요리'를 대접받았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한미일 정상 회동도 성사됐다.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이후 3개월 만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약 10분간 이어진 비공개 회동에서 "미국 대통령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덕분에 짐을 크게 덜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이 전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첨단기술 협력을 할 파트너는 군사적으로 정치 시스템, 이념과 가치에 있어서 100% 가까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에서 첨단기술을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데, 그런 관계가 한미일 관계라고 3국 정상이 믿고 있다"고 해석했다.
윤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과도 약 1년 만에 대면했다. 다만 APEC 첫 세션 전 3분가량 담소하는 데 그쳤다. 양국이 물밑 조율했던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시 주석은 이번 방미 기간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총리와 각각 양자 회담을 진행했다. 윤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 일본과 밀착하면서 상대적으로 한중 관계에는 소원했던 행보가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러 군사협력에 따라 동북아시아 안보 정세가 긴박해지고, 대중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지면서 중국과 정상급 대화가 절실해진 상황이다. 윤 대통령이 내년 초 개최가 예상되는 한일중 정상회의 등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 회복까지 끌어낼지 정상외교 과제로 떠올랐다.
윤 대통령은 또 이번 APEC 참석을 계기로 칠레, 페루, 베트남 등과 각각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의 관계 발전 방안을 논의하고 2030세계박람회 부산 지지를 호소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늦은 오후 한국에 도착한다. 이어 오는 20일 영국 국빈방문을 위해 다시 출국할 예정이다. 2030세계박람회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막판 유치전을 위해 프랑스 파리도 오는 23일~24일간 방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