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용산=박숙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공개 발언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부도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추진 등 '이념 논쟁'에 뛰어들면서 정치권에서 소모적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역사 인식' 논란은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정권에 포진하면서 예고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예비 외교관들을 향해 "외교 노선의 모호성은 가치와 철학의 부재를 뜻한다"면서 명확한 역사관과 국가관 정립을 주문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있다"면서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라고 했다.
야권은 '한·미·일 협력체'에 대해 "사실상 준군사동맹 수준"이라며 안보공동체 참여로 국민 부담이 늘어나고, 군의 전략적 자율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를 '반일 선동'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야권은 윤 대통령 발언에 대해 "연일 점입가경으로 거친 언행을 일삼고 있다"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태극기 부대 집회에서 나온 발언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라며 "'극우 꼴통정권'의 수장다운 면모"라고 꼬집었다.
◆"일본은 파트너·반공" 강조...최근엔 "이념이 굉장히 중요"
윤 대통령의 발언은 올해 갈수록 거칠어졌다. 제104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라면서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라고 했다. 일본의 강제동원 사죄와 배상 등 역사문제 언급 없이 협력을 이야기하고, 세계 변화에 따르지 못해 식민 지배를 당했다는 의미로 해석돼 3·1절 기념사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반국가세력'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라고 규정했다. 이어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면서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독립운동과 광복은 자유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앞으로도 북한, 공산주의 및 그 추종세력과 맞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연대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 특정 세력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국민 분열을 조장한다는 반발이 거셌다.
10일 후인 지난달 25일에는 보수와 진보 개념을 재정의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의 1주년 성과보고회 및 2기 출범식에서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야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힘을 합쳐서 그 방향으로 날 수 있다"면서 "시대착오적인 투쟁과 혁명과 사기적 이념에 우리가 굴복하거나 거기에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라고 했다.
같은 달 28일 여당 국회의원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는 이념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윤 대통령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며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철학이 바로 이념"이라고 한 뒤, 보수 정당이 그동안 표방해온 실용주의보다 더 상위 이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9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이라면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하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반도 분단 현실에서는 '이념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으로 풀이됐다.
최근 윤 대통령의 강경해진 발언은 '뉴라이트 역사관'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지난달 30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뒤늦게 뉴라이트 의식의 세례를 받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면서 "늦깎이 뉴라이트 의식화가 된 게 아니냐"라고 했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외부로 이전하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을 문제 삼았다.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 보호를 위해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내용을 담았던 영상은 국방부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비공개로 전환했다. 대통령실은 흉상 이전에 대해 지침을 내린 적이 없다고 일축했지만, 윤 대통령의 인식이 일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최근 흉상 이전 문제와 관련해 "어떻게 하자고 얘기하진 않겠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고 한번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밝혔다.
◆대통령 옆에는 '뉴라이트' 출신 참모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같은 역사 문제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앞으로 남은 정부 임기 기간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공산주의를 강하게 배격하는 역사관이 반영된 정책이나 조치들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들이 현 정부 출범 후 대통령실과 정부에 다수 포진돼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New Right)는 2000년대 중반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보수 세력의 불안감이 커지며 등장했다.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핵심 가치로 표방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정치권에 대거 입성해 세력을 키웠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도 국정교과서 추진 등으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보수의 대안이 아닌 이권 세력으로 전락하면서 확장하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이후 윤 정부에서 일부 인사들이 임명되면서 돌아온 것이다.
대표적인 인사가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다. 김 장관은 과거 뉴라이트 학자들의 싱크탱크인 '뉴라이트싱크넷' 운영위원장을 역임하고, 2005년 출범한 뉴라이트 역사단체 '교과서포럼'에서도 활동한 이력이 있다. 그는 '불온서적' 출판을 이유로 1987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간 옥살이도 했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었으나, 이른바 '전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사실상 총괄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도 대표적인 뉴라이트 계열 인사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당시 후보를 지지하는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김 1차장은 과거 교수 시절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 자위대 개입과 한일 군사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일본의 한반도 유사 사태 개입을 기정사실화하면 대북 억지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게 핵심 논지다. 또 과거사 문제가 한일 간 협력의 당위성을 해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논문에 담았다. 윤 정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보상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한 후 셔틀 정상 외교 복원을 거쳐 한·미·일 안보 공조 강화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외교 정책 흐름 배경에는 이 같은 역사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정 전반을 관리하고 대통령실로 들어오는 핵심 정보 취합을 담당하는 국정상황실에는 한오섭 국정상황실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정책실장 출신으로 2000년대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로 임명된 강규형 명지대학교 인문교양 교수 뉴라이트 계열로 평가받는 '한국현대사학회' 출신이다.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으로,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교과서 편찬 심의위원, KBS 이사로 재직한 바 있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을 두고 '반민족 행위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현재 대통령 소속 행정위원회인 국가교육위원회의 강혜련 비상임위원도 뉴라이트 전국연합 공동대표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