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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회가 생산적이지 않고, 정쟁에만 골몰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의 핵심적인 역할인 '입법'과 관련해 정량적 활동은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 국회가 생산적이라고 여기는 국민은 거의 없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실시한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최근 10년 연속 꼴찌를 기록(2022년 기준 24.1%, 40% 이하는 국회가 유일)한 곳이 바로 국회다. 국회 신뢰도가 낮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뒤처진 입법 활동, 잊을만하면 터지는 국회의원들의 각종 비리와 비위 행위, 민생은 뒷전이고 정쟁에 주력하는 모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다른 주요국 의회와 비교하면 우리 국회의 수준은 어디쯤일까. <더팩트>가 우리 국회와 미국·영국·프랑스 의회의 생산성을 비교·분석했다. 나아가 제대로 일하는 국회가 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국회=조성은 기자] 우리나라 국회의 부실 입법 증가는 일차적으로 발의되는 법안 수 증가와 관련이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법안 발의 건수는 16대 국회 2507건, 17대 국회 7489건, 18대 국회 1만3913건, 19대 국회 1만7822건, 20대 국회 2만4141건이다. 21대 국회에서는 25일 기준 2만3310건이 발의됐다.
특히 의원입법안이 크게 증가했다. 의원입법안은 16대 국회에서 1912건에 불과했으나 17대 국회에서 6387건, 18대 국회 1만2220건, 19대 국회 1만6729건, 20대 국회 2만3047건, 21대 국회 2만2609건(25일 기준)이다. 16대 국회 대비 21대 국회의 의원입법안은 12배가량 급증했다.
이는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다. 국회 미래연구원에 따르면 20대 국회 기준 우리 국회의원 1인당 평균 법안 발의 건수는 80.5건이다. 반면 미국은 40.6건, 프랑스는 3.5건, 독일은 1.2건, 일본은 1.3건에 불과했다.
의원입법안이 늘어난 것은 국회의원이 민의를 반영하면서, 활발한 입법 활동을 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 배경에 대해 "공천 등에서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평가하면서, 법안 발의 수를 지표로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 법안 발의 수가 늘었다"고 분석했다.
'입법 홍수'는 기존 법안 심사 시스템에 부담 증가로 이어졌다. 의원입법안은 의원실에서 직접 완성하거나, 국회사무처 법제실의 검토를 거쳐 완성된다. 입법조사처의 도움도 받는다.
국회 법제실에 따르면 법제실에 의뢰한 법률안은 16대 국회에서 1682건에 불과했으나 17대 국회 4399건, 18대 국회 2만672건, 19대 국회 2만9302건, 20대 국회 4만3135건으로 폭증했다. 21대 국회는 지난 6월 28일 기준 3만9202건에 달했다.
한정된 시간에 심사해야 할 법안이 늘어나면서 '부실 심사'로도 이어졌다. 심사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각 상임위원회가 법안의 취지를 살피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를 참고한다. 토론과 축조심사 등을 거쳐 표결이 이뤄진다.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는 전문적·중립적 입장에서 법안의 타당성과 문제점, 개선방안 등이 조사·연구·검토되어 작성되는데 과잉 금지의 원칙 등 헌법과 기존 법률과 저촉되는 부분이 없는지 살핀다.
발의되는 법안이 늘어나면서 검토보고서 작성 건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국회에 제출된 검토보고서 수를 살펴보면 18대 국회 1만388건, 19대 국회 1만4345건, 20대 국회 2만31건이다. 21대 국회에서는 지난 6월 30일 기준 1만8134건에 달한다.
상임위를 거친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의 체계·자구 심사를 거친다. 체계 심사는 법안의 위헌 여부, 타법과의 관계와 충돌 여부 등을 심사하고 법안의 형식을 정비하는 것이다. 수정 의견이 있으면 이를 의결해 다시 소관 상임위에 통보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본회의에 올라 토론 후 표결이 이뤄지면서 우리 사회와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법이 만들어진다.
의원입법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간 동안 정부입법안의 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6대 국회 595건에서 17대 국회 1102건, 18대 국회 1693건, 19대 국회 1093건, 20대 국회 1094건이었다. 21대 국회에서는 25일까지 701건 제출됐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정부입법안은 사전에 '규제영향분석'이라는 심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입법 예고된 법안에 대해 소관 부처는 규제영향분석 시스템을 통해 규제영향분석서를 작성한다. 이후에도 규제연구센터, 비용분석위원회, 규제조정실과 규제개혁위원회 등에서 심사를 거친다. 적어도 규제법률안에 대해서는 사전에 영향을 점검해 규제의 양산을 막는다.
이에 따라 의원입법안에도 '입법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입법영향분석은 법률안이 시행될 경우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반적인 영향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예측·분석하는 제도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은 법률안의 예상 효과를 포괄적으로 파악해 향후 입법 과정에 면밀히 대응할 수 있고, 상임위는 법률안에 대한 전문적·객관적·과학적인 심사 근거를 얻을 수 있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은 의원입법안에 대해 법안심사단계에서 영향분석을 실시한다. 미국은 상·하원 심사 과정에서 영향분석 등을 포함한 법안심의보고서를 제시하도록 한다. 영국은 의원입법안에도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해당 부처에서 법률안에 대한 영향평가를 실시한다.
유럽연합(EU)은 제출되는 모든 법률안에 대해 법률안 제출 시 집행위원회(EC)의 영향평가를 받는다. EC가 작성한 영향평가보고서를 참고해 필요한 경우 유럽의회조사처(EPRS)가 법률안 심의 시 보충적 영향평가를 실시한다.
우리나라도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며 제도 도입에 시동을 걸고 있다. 앞서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9월부터 입법영향분석 도입을 위한 조직을 꾸리고, 11월 국회사무처 법제실과 함께 입법영향분석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입법영향분석 제도에 대해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입법영향분석의 합리적인 방법론과 객관적인 자료·데이터를 지원하는 과학입법분석지원센터를 신설하고 지난달 20일에는 제도 설계와 시범보고서 작성을 수행하는 입법영향분석사업단도 발족했다. 관련한 홍석준·윤재옥·이종배·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안과 김태년·신정훈· 민주당 의원안도 발의된 상태다. 국민의힘은 주로 '규제'에 대한 입법영향분석 도입을 주장하는 반면 민주당은 이외의 다른 법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우리나라는 과잉 규제가 심하고 대부분이 의원입법안에서 이뤄진다. 정부안에 대한 규제영향평가처럼 의원안에도 영향평가를 통해 합리적인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며 "최소한 사전에 심사한다면 국회의원도 법안을 발의할 때 이런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고, 규제 양산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김태년 민주당 의원은 "의원입법안이 너무 많다. 법안의 질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며 "규제법안뿐만 아니라 다른 법들도 통과됐을 때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미리 분석한다면 입법 품질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정준화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입법영향분석 제도가 도입되면 앞으로 상임위 등에서 법안을 심사할 때 좀 더 탄탄하게 심사할 수 있다"며 "법을 발의한 의원들도 입법영향분석을 거치면서 만들 땐 찾지 못한 허점을 찾아낼 수 있어 더 좋은 법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법안에 대해 당장 입법영향분석을 하긴 어려우니 먼저 규제 법안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입법영향분석이 도입되면 수준이 낮고 불필요한 법안을 걸러낼 수 있다"며 "입법 수준의 향상과 함께 입법 남발로 인한 사회적 비용 감소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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