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 생산성②] 복붙하고 떼법내고…'불량 입법' 몸살


'한자어·일본어 표기 변경'으로 발의 개수 늘리기
사건 터지면 우르르 관련 법 내 '공천용 성과' 올리기도

대한민국 국회 의원들이 법안 내용은 같지만 문구만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건수를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국회의원들의 행위로 인해 과잉 입법·규제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팩트 DB

☞<①>편에 이어

우리나라 국회가 생산적이지 않고, 정쟁에만 골몰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의 핵심적인 역할인 '입법'과 관련해 정량적 활동은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 국회가 생산적이라고 여기는 국민은 거의 없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실시한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최근 10년 연속 꼴찌를 기록(2022년 기준 24.1%, 40% 이하는 국회가 유일)한 곳이 바로 국회다. 국회 신뢰도가 낮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뒤처진 입법 활동, 잊을만하면 터지는 국회의원들의 각종 비리와 비위 행위, 민생은 뒷전이고 정쟁에 주력하는 모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다른 주요국 의회와 비교하면 우리 국회의 수준은 어디쯤일까. <더팩트>가 우리 국회와 미국·영국·프랑스 의회의 생산성을 비교·분석했다. 나아가 제대로 일하는 국회가 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국회=송다영 기자] 2020년 12월 17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철도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왜곡된 법률용어와 문장을 한글화하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식 용어 등을 한글화하거나 보다 쉬운 표현으로 개정함으로써 법률에 대한 국민의 이해 정도와 접근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데에 기여하고자' 발의됐다. 내용은 철도교통법 제10조 제1항 중 '지불'을 '지급'으로 변경하는 내용이다.

정 의원은 철도사업법 외에도 비슷한 시기(12월 15·17일)에 △하천편입토지 보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제9조 제1항 중 '지불'을 '지급'으로 한다) △지속가능 교통물류 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제2조 제12호 중 '지불'을 '지급'으로 한다) △재외국민보호를 위한 영사조력법 일부개정법률안(제19조 제3항 중 '지불'을 '지급'으로 한다) 등 총 4개의 법안을 발의했고, 이후 모두 본회의에서 원안가결됐다. 법안 내용은 모두 같았으나 '복붙'(복사+붙여넣기)한 4개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정 의원 사례 외에도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용어 정비', '자구 수정', '표현 정비' 등을 검색하면 의원들의 법안 건수 늘리기용 입법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식 표현'이라는 검색 문구를 입력하면 21대 국회 들어 177건(8월 16일 기준)의 법안이 단어 몇 개만 바꾸는 내용으로 발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원들의 법안 개수 늘리기식 발의 반복은 결국 이 수치가 향후 공천에 점수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일본어, 한자 표기를 단순 한글 표기로 바꾸는 법안은 난이도가 비교적 낮은 데 비해 법안 통과 확률이 높아, 법안 개수 채우기 및 통과율 올리기에 신경을 많이 쓰는 의원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실적용 입법'을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법안마다 국회사무처에서 검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등 동원되는 인력과 재원이 많다. 이런 법안은 사무처나 각 상임위에서 일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거액의 가상화폐 보유 의혹이 일었던 김남국 코인 사태 당시 의원들은 공직자 등록 대상 자산에 가상자산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은 공직자윤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우후죽순 발의했다. /이새롬 기자

대한민국 국회의 과잉 입법으로 꼽히는 사례는 또 있다. 사회적 논란이 이는 사건이 생겼을 경우 의원실에서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우후죽순 쏟아내는 것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 이후 이를 바로잡겠다며 빠른 시간 안에 법안을 내다보니 내용이 부실해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역효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최근 사례로는 이른바 '김남국 코인 방지법'이 있다. 지난 5월 거액의 가상화폐 보유 의혹이 일었던 '김남국 코인 사태' 당시 의원들은 공직자 등록 대상 자산에 가상자산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은 '공직자윤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우후죽순 발의했다. 5월 2일~19일 사이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은 11건이나 발의됐다. 해당 법안들은 5월 25일 본회의에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모두 '대안반영폐기'라는 명목으로 가결됐다.

숙고 없는 법안 가결은 후폭풍을 낳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타다 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은 지나친 규제로 스타트업 시장 침체를 가져온 법안으로 꼽힌다. 타다 금지법은 타다 서비스를 '불법 운송사업'으로 규정한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으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21대 총선 직전인 2020년 3월 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후 타다를 포함한 운수 관련 스타트업들이 크게 위축되는 후폭풍을 낳으며 비판이 쏟아졌다.

장예찬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 여선웅 전 청와대 청년소통비서관 등 여야 청년 정치인들은 '타다금지법 폐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18대 국회에서는 청소년의 게임 시간을 제한하는 '셧다운제'(청소년보호법 개정안)를 통과시켰다가 10년 만인 21대 국회에 들어서야 폐지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에게 게임 중독이 가져올 악영향에 대한 우려로 17대 국회에서부터 입법 논의가 시작됐다. 결국 18대 국회 말기인 2011년 4월 관련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고, 그해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셧다운제가 실시됐다. 그러나 셧다운제가 게임 업계 성장을 저하시키고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과잉 규제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결국 셧다운제 시행 10년 만인 2021년 11월 셧다운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을 국회가 처리하며 셧다운제는 막을 내리게 됐다.

국회 인력 효율화와 국회 신뢰도 향상을 위해서라도 단순한 법안 발의·처리 건수만을 늘릴 것이 아니라, 다각화된 입법 영향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더팩트 DB

23일 현재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는 총 2만2054건의 법률안이 발의돼 6706건의 법률안이 처리(원안+대안반영+수정반영+대안반영폐기)됐다. 1년 동안 평균 약 7272개의 법안이 발의된 셈이다.

몇몇 해외 사례를 살펴도 한국 국회처럼 법안 발의와 가결을 '많이' 하는 나라는 드물다.

미국 의회의 경우 법안 발의 수는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가결되는 법안은 극소수다. 7월 26일 기준 제118대 연방의회(2023-2024)에서 7293건의 법률안(상·하원 포함)이 발의됐고, 이 중 '7건'이 상·하원에서 가결된 후 미국 대통령에 의해 공포되어 법률로 확정됐다.

미국 의회에서 가결된 법안의 주요 내용은 △연방정부의 부채 한도와 재량지출 한도 상향 조정 △연방항공국에 국제법 또는 국내법에서 요구하는 항공 임무에 대한 통지 개선을 위한 TF 구성 △연방정부(보훈부)가 전시장애보상금, 부양가족에 대한 추가 보상금, 특정 상이군인에 대한 의복수당, 생존 배우자 및 자녀에 대한 보상금을 인상하도록 요구 △국가정보국이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와 COVID-19 기원 간 잠재적 연결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기밀을 해제하도록 요구 △6개 주 해양 아카데미 중 하나에 다니고, 졸업 후 복무 의무를 이행하는 생도에 재정 지원 확대 △연방정부의 규정을 100자 이내로 요약한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도록 규정 △2023 회계연도에 특정 주요 의료 시설 프로젝트를 재향군인회가 수행할 수 있는 권한 부여 등이다.

영국 의회는 법안 발의 건수 자체가 적다. 2022-2023년 회기 중 7월 26일 기준 345건의 법률안이 발의됐고, 이 중 50건이 상·하원에서 가결된 후 국왕에 의해 승인돼 법률로 확정됐다.

영국 의회에서 가결된 법안의 주요 내용은 △공직선거에서 투표 완료된 투표용지의 비밀성을 높이려는 조치 마련 △1981년 영국 국적법 이후 이민 정책에 나타난 관행을 법에 반영 △돌봄 책임이 있는 직원을 위한 무급휴가 근거 마련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 가격을 조정·통제하고, 에너지 생산 기업의 부담금을 상향하는 등 관련 사항을 규정 △공공재정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국가채무 및 공공재원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 △국가안보와 관련된 소송에서 손해배상 등과 관련된 사항 등 규정 △신생아 양육 책임이 있는 직원의 휴가 및 급여에 관한 사항 등 규정 등이다.

프랑스 의회에선 최근 1년간 △개인정보 보호 및 관리 강화 △장애인 학생과 교육 보조원의 권익 보호 강화 △가정폭력 피해자를 구제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사항 규정 △경제, 보건, 노동, 운송, 농업 분야와 관련해 EU 법률의 국내 적용을 위한 사항 규정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반유대주의적 박해의 맥락에서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에 관해 필요한 사항 규정 △기존 원자력 부지 인근에 신규 원자력 시설을 건설하고 기존 시설을 운영하는 절차의 신속화에 관해 필요한 사항 규정 △세관 분야에서 다양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 규정 등 총 49건의 법률안이 의결됐다.

각국의 상황이 다른 만큼 가결된 법률안의 공통점을 따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주요 3국 의회는 우리나라 국회에 비해 더 많은 회의를 열어 신중하고 다양한 논의를 거친 후 새로운 법안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국회미래연구원에 발표된 자료(2020년 10월)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1인당 검토해야 할 법안 건수는 미국의 2배, 프랑스의 23배, 일본의 62배, 영국의 91배다.

국회 인력 효율화와 국회 신뢰도 향상을 위해선 단순한 법안 발의·처리 건수만을 늘릴 것이 아니라, 다각화된 입법 영향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③>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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