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동작=조채원 기자] "사람은 고립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뭐든 해 볼 수 있어요."
극단 '문화잇수다' 김봄희 대표는 지난 1일 <더팩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와 가장 힘들었던 건 다수가 공유하는 문화를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소수로서의 단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동국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한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 대표는 '탈북민 출신'이라는 이색 이력을 갖고 있다. 40개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고 한국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그는 "고립됐다는 느낌을 받으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쉽지 않더라"고 했다.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암묵적으로 '남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어려워요. 제겐 평생 인정 받을 방법이 없는 거에요. 그렇지만 예술가로서는 정말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일까. 김 대표 연극엔 '연결'이라는 공통 주제의식이 담겼다. '환영의 선물'은 탈북민임을 부정하며 한국에 사는 주인공이 '진정한 나'와, '소라게와 바다'는 남북한에 각자 살던 가족이, '벤다이어그램'은 남북한의 남녀가 만나 연결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소라게와 바다'는 신춘문예 당선자를 작가로 초대했고 나머지 두 작품은 직접 썼다. 김 대표는 연출 의도에 대해 "문화가 다른 남북한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지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남북한 주민 통합' 같은 거시적 느낌으로 바라보기보단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울려 사는 소중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새 김 대표는 또 다른 '고립된 이들'에 주목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선정 지원작 '유모차를 끄는 그 사람'이 그것이다. '대충 살까'했던 그는 엄마가 되고 나서는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고민하게 됐다. "아이가 100일이 됐을 때부터 유모차를 끌고 일을 다녔어요. 지하철 한번 타려 해도 1시간은 여유 있게 나가야 하더라고요. 출생률 걱정하는 우리 사회가 왜 저출생·고령화 시대가 왔는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이에요. 저출생 시대에서는 아기 엄마들도 탈북민처럼 이 사회의 소수자거든요."
김 대표는 1989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2006년 탈북해 중국, 태국을 거쳐 2008년 한국에 왔다. 북한에서 학창 시절 선전대를 운영하는 음악선생에게 발탁돼 연기·춤·노래로 '체제 선전 활동'을 했다. 특별히 '한국에서 연극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북한에서도 연기를 했고 '중국 가면 예술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한국 가면 네가 좋아하는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거 할 수 있다'는 엄마 말에 탈북한 거라 '애초에 그냥 할 생각'이었다. "한국에 와 연극학부 가겠다 하니 부정을 많이 당했어요. 연극 전공해 졸업해도 필드 못 나간다, 필드 나가도 돈 못 번다, 좋은 집에 시집도 못 간다, 애 낳고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내가 무언가를 못할 이유는 수천만가지더라고요. 그 중 하나는 '탈북민 출신'이라는 거였고요."
어려움도 있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 새벽 3시까지, 한달 넘게 일한 아르바이트비를 소스란히 떼인 일이었다. 지각을 세 번 했다는 이유였다. 김 대표는 10여년 전 일이지만 그 당시 사장의 말투, 옷 색깔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돈을 달라 했더니 '신고하려면 해라, 이 동네 경찰 내가 다 잘 안다. 너 고소할 거고 다시는 취직 못하게 만들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소린데 아무말도 못하고 쫒겨난 게 충격이 너무 컸어요." 공포에 더 익숙했던 그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다수의 탈북민과 마찬가지로 김 대표도 북한에서, 탈북 과정에서 극단적 상황에 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한테 물린 사람이 고양이 꼬리 보고도 놀라는 격이랄까요. 어마무시한 공포를 일정 기간 겪은 사람은 매사에 늘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무수한 이들의 도움도 받았다. '재능 기부'로 연기, 피아노, 영어 등을 배웠고 그가 연극과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해 준 이들도 있었다. "탈북민들도 요새는 연극학부에 가긴 꽤 많이 간다는데 막상 저처럼 필드에 나온 사람은 많지 않아요. 저도 학교 다닐 때 '여기서 멈춰야 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의 위기상황이 있었죠. 그 때마다 '일단 졸업하고 도전해보고 그 다음에 다른 거 해도 상관없다', '이거 하고 싶어 여기 왔으니 조금만 더 버텨보라'며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 지금, 탈북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달라졌을까. 김 대표는 "대체로 북한에 무관심한 것 같다, 그런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너무 프레임이 강하다"고 답했다. "탈북민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너무 견고하게 정해놨달까요. 여기 있다고 북한에서 온 김봄희가 그동안 겪은 일들이 사라지지 않아요. 괜찮은 척 할 필요는 없지만 '불쌍한 이미지'를 유지할 필요도 없는거에요. 나는 지금의 나대로 '마이웨이' 하면 되는 건데. 저한테는 그래도 괜찮은데 우리 아이한테는 그런 프레임이 안 씌워졌으면 좋겠어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 "그저 엄마로서 무섭다"는 김 대표. 그에겐 어느 쪽이든 내 아이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쪽이 악(惡)이다. "여기서 지낸 동안 '북한에 너희 사촌들이 있을텐데 전쟁 나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되면 누구 편 들거냐'는 질문을 엄청 받았어요. '총 잡기도 전에 다 죽는다'고 웃으며 받아쳤지만 사실 굉장히 비극적이죠, 누구를 적대시하고 죽일 건지 스스럼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볼 수 있다는 게. 이런 폭력성, 억압에 대해선 우리 사회도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전쟁 걱정 없는 안전한 사회,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연결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다른 문화, 다른 생각을 편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욕하고 열등시 하는 사람들도 막상 만나면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 그리고 서로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전 제가 바라보는 삶을 제 작품에 녹이며 계속 제 길을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