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허주열 기자]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아 '무적(無籍)' 상태인 미등록 영·유아가 '2236명'(2015년생~2022년생)에 달한다는 감사원 조사 결과가 지난주에 나왔다. 출산 기록은 있으나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이 영유아들은 제도권 밖에서 소외·방치되고 있었다. 심지어 생명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 2020년부터 국회에 10건 이상 발의됐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법치국가에서 법률은 모든 국가작용의 근거다. 법률을 만들고, 개정하는 것은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권한이다. 그 권한을 국회가 제대로 행사하지 않아 수천 명의 영유아가 제도권 밖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방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감사원이 3월 29~5월 17일 보건복지부에 대한 정기감사를 실시해 위기아동에 대한 정부의 관리실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미등록 영유아 현황이 드러났다. 이 아이들 중 △학령기 아동이지만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경우 △보호자가 타당한 사유 없이 연락을 거부한 경우 △1명의 보호자가 2명 이상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 등 '위험도'가 높은 23명의 아동의 상태를 각 관할 지자체와 함께 확인한 결과 대부분의 아동이 필수 예방접종, 아동수당, 보육 지원 등 복지에서 소외되거나 범죄 등 위기상황에 노출된 채 무적자로 양육되면서 생존 여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일부 무적 아동은 이번 감사에서 영양결핍 등으로 이미 사망했고, 보호자가 베이비박스에 유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수원시와 함께 조사 중이던 2명의 아동은 경찰 수사 결과 출생과 동시에 친모에게 살해되어 집 냉장고 안에 보관돼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무적 아동의 안위(安危)와 관련한 경찰 수사도 진행되고 있는 만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피해 아동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지난 22일 울산의 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선 남아로 추정되는 영아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아이 사례는 감사원 감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무적 아동을 막을 수 있는 법안은 이미 국회에 10건가량 발의돼 있다.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7월 16일 발의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하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2020년 12월 1일, 2023년 3월 15일 2건) △정청래 민주당 의원(2021년 1월 21일)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2021년 1월 28일)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2021년 3월 15일) △최혜영 민주당 의원(2021년 3월 15일) △송재호 민주당 의원(2021년 5월 11일) △신현영 민주당 의원(2023년 5월 17일)이 의료기관 등에 아동의 출생 통지 의무를 부여하는 이른바 '출생통보제'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부도 2022년 3월 4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미국·영국·캐나다·독일·호주 등에선 출생통보제를 통해 출생 신고 누락을 예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을 도입할 경우 경제적·사회적으로 곤경에 처한 임신부가 병원 밖 출산을 선택할 수 있다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려움에 처한 임신부가 신원을 노출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은 후 지자체 등에 아이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담은 '위기임산부 및 아동 보호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2021년 5월 26일)도 발의됐지만, 아직 계류 중인 상태다.
여야 의원들과 정부가 3년 전부터 발의한 이 법안들은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사이에 지난 '인천 8세 미등록 여아 살해 사건'(2021년 1월), '경북 구미 3세 미등록 여아 살해 사건'(2021년 2월) 등 미등록 아이와 관련한 충격적인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기도 했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에는 출생 신고는 출생 후 1개월 이내에 부모가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이 규정한 기한 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은 '5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끝이다. 이런 법률로는 미등록 아동이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이미 수차례 확인됐지만, 법을 개정할 권한을 가진 국회는 이제서야 뒤늦게 논의에 착수했다.
의료기관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출생신고 책임을 부과하는 출생통보제 도입 법안은 28일에야 입법 첫 문턱을 넘었다. 여야는 이날 오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를 열고 이같은 내용을 담은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여야 지도부도 이 개정안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만큼 오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출생통보제는 처리될 예정이다. 출생통보제가 시행되는 시점은 법안 공포일로부터 1년 후다.
이와 관련해 법사위 여당 간사인 정점식 의원은 "1년 이내에 보호출산제가 도입돼야 한다는 데 소위 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며 "보건복지위에 보호출산제 도입을 조속히 해달라고 건의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당정은 출생통보제의 도입 시 병원 밖 출산이 늘어날 수 있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익명 출산을 보장하는 '보호출산제'도 동시에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시민단체와 야당 일각에선 아동의 알 권리 침해, 양육 포기 조장 등의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보호출산제가 언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지는 미지수다. 김성주 민주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내부적으로 논의한 결과 당이 어떤 입장을 정하기보다는 해당 상임위인 복지위 논의에 맡기기로 했다"며 "보호출산제가 시행됐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복지위 소위 위원들이 논의해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수석부의장은 "서둘러서 결론을 내면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며 "(처리 시한을) 정하지 않고 충분히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국제아동인권센터,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등 20개 비영리단체가 모인 보편적출생신고네트워크 측은 "의료기관의 출생통보 절차를 명시한 다수의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이 21대 국회에 이미 발의되어 있었다"며 "아동의 출생 사실과 출생 신고 여부를 확인하고, 출생이 신고되지 않은 아동을 지자체 등이 직권으로 기록하는 출생통보제가 진작에 마련되어 있었다면, 5년 전 발생한 아동 살해 사건이 이제서야 밝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안은 명백히 국가의 책무 위반"이라고 꼬집었다.
이들은 보호출산제와 관련해선 "부모가 자녀의 출생을 당연히 알리도록,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의 미비를 인정하고, 개선 방향을 찾아야 한다"며 "엄마의 정보를 숨기는 것이 아동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은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명시된 아동의 정체성에 대한 권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보호할 수 없다. 오히려 아동의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가질 권리, 양육과 보호의 청구권을 영구히 박탈하는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보호출산제가 아니라, 보편적 출생등록제를 어떻게 완비할 것인지 논의해도 부족할 시간"이라며 "더 이상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번 (국회) 회기 내에 출생통보제 도입을 비롯해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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