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조성은 기자] 정승일 한국전력공사(한전) 사장이 12일 임기를 1년 가까이 남기고 사퇴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그동안 38조에 달하는 한전의 적자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정 전 사장의 사퇴를 압박해 왔다. 적자를 문제 삼았지만, 적자의 근본적인 원인이 '역마진 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정 전 사장이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임명된 인사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전 정부 시절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에 대한 사퇴 압박이 커지면서 정부·여당이 총선을 앞두고 '친정부 체제'를 공고히 해 정책 엇박자를 줄이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정 전 사장은 이날 부동산 자산 매각, 임직원 임금 동결 등의 자구안을 발표하며 사의를 표명했다. 국민의힘이 공개적으로 사퇴를 촉구한 지 보름만이다. 자구안은 '창사 이래 최대'인 25조 7000억 원 규모로, 수도권 대표 자산인 여의도 남서울본부를 매각하고 강남 한전아트센터 등은 임대키로 했다. 2급 이상 임직원은 올해 임금 인상분 100%를, 3급은 50%를 반납한다. 국민의힘이 요구한 '전 직원 임금 동결'에 대해서는 노조와 협의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전 영업손실의 주요 원인이 '원가보다 낮은 전기요금'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긴 어렵다. 특히 지난해 대규모 적자의 원인은 연료비와 전력 구입비가 많이 증가한 탓으로 한전의 '방만 경영'을 원인으로 보기도 어렵다. 전기요금은 전력을 판매하는 한전이 시장 논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여당이 결정해 왔다.
정 전 사장도 이날 입장문에서 "현재 전력 판매가격이 전력 구입가격에 현저히 미달한다"며 "요금 정상화가 지연되면 전력의 안정적인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한전채 발행 증가로 금융시장 왜곡과 에너지산업 생태계 불안 등 국가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다"면서 전기요금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를 감안해 전기요금 적기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 대한 국민 여러분의 깊은 이해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정 전 사장은 전날(11일)에도 "한전 경영 정상화에 가장 시급한 것은 요금의 정상화"라고 했다.
정 전 사장은 전방위적인 사퇴 압박을 받아왔다. 정부·여당은 2분기(4~6월) 전기·가스요금 인상 폭 결정을 "한전의 대규모 적자에 대한 대책이 먼저"라며 40일 이상 미뤄왔다. 지난 11일 전기·가스요금 인상안을 확정하기 위해 예정된 당정 협의회는 한전의 자구안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돌연 취소됐다. 사실상 정 전 사장에 대한 사퇴 압박으로 해석됐다.
이는 '전 정권 흔적 지우기'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국무회의에서 "탈원전, 이념적 환경 정책에 매몰돼 새로운 국정 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스탠스를 취한다면 과감하게 인사 조치를 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인 10일 산업부의 에너지정책을 총괄하는 2차관이 교체되며 정 전 사장의 사퇴를 압박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정 전 사장은 지난달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 시 수행 경제인 명단에 포함됐다가 출국 직전에 빠졌다.
국민의힘도 정 전 사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이었던 '탈원전'을 언급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2일 "졸속 탈원전으로 26조 원 손실을 볼 때 한전 사장은 뭘 하고 있었냐"며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알지만, 국민에게 손 내밀 염치는 있어야 한다. 그런 노력도 못 한다면 자리를 내놓길 바란다"고 했다. 지난달 28일에는 "방만 경영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국민의힘은 최근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들에 대해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해킹 논란을 문제 삼았다. 선관위는 특혜 채용 의혹에 대해서는 "채용은 사실이지만 투명한 채용 과정을 거쳤다"며 "특혜가 있었다면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해킹 논란에 대해서도 선관위는 △북한 해킹 내용이 언급된 메일과 문서를 국정원으로부터 통보받은 바 없고 △선관위 정보 시스템의 피해 사례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헌법상 독립기관으로서 행정안전부나 국정원의 보안 컨설팅을 받으면 정치적 중립성에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기현 대표는 11일 국회에서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한다"며 "철저한 진상조사가 반드시 성역 없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총선이 다가오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노 위원장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김 대법원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
같은 날 김민수 대변인 명의의 논평에서 "민노총 고용세습에 이어서 이번엔 공정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선관위의 고용세습 의혹이 줄줄이 드러나고 있다"며 "선관위가 제아무리 국정원의 보안점검과 감사원의 감사조차 거부하는 무소불위의 치외법권 행태를 보일지라도 국민 위에 설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노태악 위원장은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진실을 밝힐 것은 촉구한다"
지난 10일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해외토픽에나 등장할 만한 희대의 '소쿠리 투표', 문재인 캠프 출신의 조해주 전 선관위원을 위시한 편향적인 유권해석으로 일관했던 선관위에서 이번에는 특혜 채용 논란이 불거졌다"며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관리하며, 어느 곳보다 '공정'과 '중립'을 추구해야 할 선관위에서 또다시 스스로의 존립 가치를 훼손시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태악 위원장은 직(職)을 걸고 해당 사안에 대해 조사는 물론, 필요하다면 감사원 감사도 청구해야 할 것"이라며 "나아가 위법 사항이 있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수사도 촉구한다"고 했다.
노 위원장뿐 아니다. 현 정권 출범부터 사퇴 압박을 받아온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과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대한 거취 압박도 강해졌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4일 페이스북에 "반정부 정부기관장, 무슨 미련 있나"면서 "북한 해킹에도 보안 검증 거부하는 선거관리위원회와 김일성 찬양 웹사이트 차단 거부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종편 재승인 점수 조작 관련 혐의로 기소된 방송통신위원장 그리고 감사원 감사 거부하고 감사원 앞에서 출두 쇼하는 권익위원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 기관은 전 정권 충신들에게 영양분 공급해 주는 숙주가 아니"라며 "반정부 노릇하면서 정부에 몸담는 것은 공직자 본분에 반하는 이율배반적 행위"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반대로 가면서 정부 월급 타 먹는 것은 국민 세금 도둑질"이라고 힐난했다.
국민의힘 정보통신기술(ICT)미디어진흥특위는 지난 3일 성명서를 내고 "한 위원장은 재임 기간 민주당에 유리한 수많은 편파방송과 가짜뉴스를 묵인하거나 방조한 행위만으로도 이미 자격 상실"이라며 한 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정 위원장에 대해서는 KBS, MBC 등 공영방송의 편파·왜곡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지난 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여당 간사인 박성중 의원은 회의에서 "KBS, MBC, YTN 등 언론사들이 이념적으로 좌편향됐다"며 "이는 방심위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탓"이라면서 정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오는 6월 말까지 임기인 전 위원장은 업무와 근태를 문제로 지난해 8월부터 감사원의 감사를 받고 있다. 한 위원장은 TV조선 재승인 점수 조작 혐의로 최근 불구속 기소돼 면직 절차에 착수했다. 한 위원장의 임기는 7월 말까지로, 방통위는 지난해 9월부터 5번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뒤인 2022년 6월부터 "공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면서 한전 등 공공기관을 압박했다. 김현준 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은 임기를 1년 8개월, 김진숙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6개월, 나희승 전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은 1년 8개월, 김경욱 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10개월을 남기며 주요 공기업 사장들이 물러났다. 모두 전 정권에서 임명된 인사들이다. 강도 높은 감사를 받으며 업무보고·의전 배제를 요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