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대한민국이 '사기 범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불거진 '학원가 마약 음료' 신종 보이스피싱 사기, 전세사기,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 '주가조작' 등 충격적인 사기 범죄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기 치기 좋은 나라'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정치권 인사는 물론 다수의 언론, SNS(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도 관련 '통계 수치'를 인용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 사기 범죄 1위'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오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정부의 전세사기 피해 지원 대책을 설명하면서 "전세사기뿐 아니라 주가조작이나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 영세상인들을 위한 사기피해 등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사기피해 건수와 액수가 가장 많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이정재 대통령직속 국민통합위원회 '민생사기 근절 특별위원회' 위원장도 지난달 24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사기 범죄율은 1위지만 처벌 수위는 가장 낮아 사기꾼의 천국이 된 지 오래"라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일까? 온라인상에는 'WHO(세계보건기구)가 2013년 발표한 '범죄 유형별 국가 순위'에서 OECD 국가 중 사기 범죄율 1위 국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확산해 있다. 자료 출처는 'WHO 글로벌 헬스 옵저버토리'(global health observatory)로 돼 있다. 그러나 WHO 누리집의 'Global Health Observatory' 온라인 데이터, 간행물 어느 곳에서도 관련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다른 국제기구인 'UNODC'(유엔마약범죄사무소,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데이터 포털의 '부패 및 경제 범죄' 카테고리에서 각국의 '사기(Fraud)범죄 발생 건수'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정의한 사기란 '금전 등의 이익을 얻거나 기만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 부정한 행위(Obtaining money or other benefit, or evading a liability through deceit or dishonest conduct)다. 2020년 기준 OECD 가입국가(38개국) 중 한국을 비롯해 미국, 체코,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튀르키예, 영국, 이스라엘 등 8개 국가의 데이터는 없었다. 이들 국가를 제외하고 30개국 중 국민 10만 명당 사기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한 국가는 2762건의 스웨덴이다. 인구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 발생 건수로는 독일이 80만8074건으로 가장 많았다. 원데이터 출처는 UN의 '범죄 동향 및 형사 사법 시스템 국가 조사(United Nations Crime Trends Survey)다.
대검찰청 발생통계원표에 따르면 한국의 2020년 사기범죄 발생건수는 35만3657건이다. △독일 80만8074건 △스페인(36만551건)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인구 10만 명당으로 환산하면 한국은 682.2건으로, △스웨덴(2762.1) △독일(964.4) △덴마크(929.9) △핀란드(850.6) △벨기에(806.8) △스페인(771.1)이 우리나라보다 수치가 높다.
각국마다 범죄통계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시스템, 범죄의 구성요건이 다르기 때문에 살인을 제외한 범죄 수치의 단순 비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고소·고발 체계가 발달한 한국의 사법 환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사기 범죄 증가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고 전 세계적인 추세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거의 시기가 맞물리는데, 스마트폰으로 범죄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불특정 다수·다중 피해 사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핀테크 등 금융 기술이 발달해 있고, (상대적으로) 고소·고발 제도가 확립이 잘 돼 있다. 미국은 사기당했다고 경찰관이 고소장 안 받아준다. 일본 경찰도 개인 간 채권 채무는 아예 접수를 안 시켜준다. 모두 민사적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종합하면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 사기 범죄율 1위'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국내 형사범죄 가운데 '사기 범죄' 발생 비율이 가장 높다는 점은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원구원이 지난 4월 21일 발표한 '2022년 4분기 범죄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2022년 4분기 발생한 전체범죄는 41만4708건이다. 발생건수가 가장 많은 범죄유형은 재산범죄(16만6928건)이고, 이중에서도 사기 발생 건수(8만380건, 전체의 약 19%)가 가장 많았다. 이어 △절도(5만2570건) △횡령(1만7377건) △손괴(1만5432건) △배임(1105건) △장물(64건) 순으로 나타났다. 지난 한 해 사기범죄 발생 건수는 33만390건이었다.
신·변종 사기 수법이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이에 따른 국민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입법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와 관련,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8월 '사기방지 기본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사기 범죄 예방에 초점을 두고 사기범죄 정보 수집, 분석 및 제공을 위한 사기정보분석원 설치, 특정사기범죄 행위자에 대한 신상정보 공개, 특정사기범죄 수사 시 경찰의 위장수사 허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전문가는 사기 범죄 '예방'을 전담·대응하는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증가한 사기 범죄 유형은 과거처럼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갚는 식이 아니라 계획적인 악성(惡性) 사기 유형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분석, 대응하는 기관이 필수라는 것이다. 서 교수는 "사기 범죄는 바이러스 같아서 계속 수법이 바뀌기 때문에 현장 기관에서 요즘 유행하는 것들을 알려줘야 한다. 또 사후적인 고소만 하면 뭐 하겠나"라며 "실질적으로 지금 어떤 사기 범죄가 제일 유행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사기를 잘 당하는지 동향을 분석하는 사기 예방센터를 만드는 게 꼭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