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허주열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5박 7일간의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12년 만에 이뤄한 우리나라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미국 측은 극진한 태도로 윤 대통령 부부를 맞이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찾은 윤 대통령은 양국 동맹을 업그레이드하고,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다만 양국 경제 이슈와 관련해 구체적인 해법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또한 미 정보기관의 우리 대통령실 '도청'에 대해서 한 마디의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은 것을 두고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달 24일 출국한 윤 대통령 부부는 미국 워싱턴DC에서 3박 4일간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별도의 친교 시간을 갖고 한미 정상회담, 국빈 만찬,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미 국방부인 펜타곤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이후 보스턴으로 이동해 2박 3일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디지털바이오 석학과의 대화, 한미 클러스터 라운드 테이블 참석, 하버드대학교 연설 등을 했다.
◆대통령실, '확장억제 강화' 최대 성과
대통령실이 스스로 꼽은 이번 방미의 최대 성과는 확장억제를 강화하기로 한 것을 명문화한 '워싱턴 선언'을 통해 북핵 위협에 대비한 강력한 한미 공제를 국제사회에 선포한 것이다. 워싱턴 선언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핵 및 전략 기획을 토의하며, 비확산체제에 대한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차관보급 협의체인 핵협의그룹(Nuclear Consultative Group, 이하 NCG)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한미 양국은 이번에 미국의 핵무기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와 공동 계획 메커니즘을 마련한 만큼 우리 국민들이 '사실상 미국과 핵을 공유하면서 지내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둘째, 핵확산금지조약(NPT) 준수에 대한 한국의 의지를 재차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북한의 핵, 미사일 고도화에 맞서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국내 일각의 목소리에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 북한의 핵 공격 상황이 발생하면 한미가 협의를 하고, 미 대통령의 결정으로 미국이 가진 핵으로 보복한다는 대응 방침을 명확히 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 공격 시 즉각적인 정상 간 협의를 갖기로 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를 포함해 동맹의 모든 전력을 사용한 신속하고, 압도적이며, 결정적인 대응을 취하기로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에드 케이건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 국장은 지난달 27일 한국 특파원단 브리핑에서 '한국 정부는 워싱턴 선언을 사실상의 핵 공유 협의라고 설명하는데, 미 정부가 동의하는 설명인가라는 질문에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우리는 이 선언을 실질적인 핵 공유 협의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우리 대통령실 설명과 다른 평가를 내놨다. 미국이 가진 핵무기를 한반도에 재배치하지도 않고, 그것을 사용할 결정권도 미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와 관련 윤 대통령은 같은 달 28일 하버드대 연설에 이어 조셉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 및 청중과 진행한 대담에서 "워싱턴 선언은 1953년 재래식 무기를 기반으로 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이제 핵이 포함된 한미 상호방위 개념으로 개선한 것"이라며 "나토식 핵 공유와 다르긴 하지만 실효성 측면에서는 1대1로 맺은 것이기 때문에 나토의 다자 약정보다는 '더 실효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재차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자체 핵무장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미국에 명확히 재차 밝히면서, 얻어낸 최대 성과가 "미국의 핵 자산을 한반도에 배치하지는 않고, 북한의 핵 공격 시 한미가 협의한 뒤 핵무기를 포함한 대응을 미 대통령이 결정한다"에 그쳐 보수 일각에서도 성과가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미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9일 보도에서 전문가들의 발언과 조선일보 사설을 인용해 "한국 일각에서 워싱턴 선언이 한국의 자체 핵 개발이나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 요청을 일축하기 위해 신중하게 만들어진 설계로 보고 있다"며 "미국에서 받은 것은 적은 반면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왔다는 비판이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양 정상은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한미동맹을 기존 안보와 경제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사이버, 우주 등의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글로벌 동맹'으로 기존 동맹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통령실은 "이번 방문을 통해서 한미 간에 경제산업 협력이 우주, 사이버, AI(인공지능), 퀀텀(양자) 분야까지 대폭 확대됐다"고 자평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대만 이슈 등 다른 글로벌 현안도 양 정상 회담 테이블에 올랐다. 다만 방미 전 윤 대통령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수준보다는 낮은 수준의 대화만 오갔다. 관심이 집중됐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문제는 직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으며, 대만해협·남중국해 이슈의 경우 "역내 안보와 번영의 필수 요소로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내용만 공동성명에 담겼다.
◆尹, 국빈 만찬장서 '아메리칸 파이' 열창 등 화제
윤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지난달 26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 만찬은 특히 화제를 모았다. 양 정상은 3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만찬 내내 돈독한 유대 관계를 보이며 한미동맹 70년의 두터운 신뢰를 드러냈다.
특히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 권유에 "한미동맹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주주이신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한 소절만, 그런데 기억이 잘 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55초가량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했다. 윤 대통령의 노래가 끝난 뒤 내빈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날 국빈 만찬 참석자들이 윤 대통령이 노래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미국 SNS 등에 퍼지면서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이도운 대변인은 현지 브리핑에서 "백악관 측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만찬장에서 연주를 하겠다고 청하면서 곡명을 물어왔다. 그래서 대통령실에서는 '아메리칸 파이'를 좋아하는 노래라고 알려 줬다"며 "그래서 만찬에서 뉴욕의 유명한 뮤지컬 스타들이 '아메리칸 파이'를 불렀고 노래가 끝난 다음에 바이든 대통령이 갑자기 윤 대통령께 노래를 청했다. 윤 대통령은 약간 당황스러운 측면이 있었지만 만찬에 참석한 분들이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인사들이고, 핵심적인 지지자들이고, 또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서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박사 내외가 기울인 노력을 잘 알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어서 한 소절 불렀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7일 윤 대통령의 영어로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 것도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연설한 것은 역대 일곱 번째이며, 2013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이후 10년 만이다.
윤 대통령은 '자유의 동맹, 행동하는 동맹'을 주제로 44분간 영어 연설에서 한미동맹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미국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연설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로, 모두 46차례 등장했다. 박수는 56번, 기립박수가 23번 나왔다.
윤 대통령은 같은 날 워싱턴DC 외곽에 있는 미 국방부 청사(펜타곤) 군지휘통제센터(NMCC)를 찾아 미군 수뇌부로부터 위기대응 체계 등의 보고를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NMCC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제 성과' 및 '도청 대응' 두고 뒷말 무성
윤 대통령은 앞서 수차례 모든 순방은 '경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본인이 '대한민국 제1호 영업사원'이라고 강조했다. 연장선에서 이번 순방에는 삼성·현대·SK·LG·롯데그룹 총수 등 주요 대기업 대표를 포함해 122명의 경제사절단이 동행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는 상대적으로 성과가 미미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번 순방에서 우리나라는 넷플릭스 등 미국 기업으로부터 총 59억 달러(약 7조9000억 원)에 달하는 투자를 유치하고, 양국 기관·기업 간에 50건에 달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와 관련 바이든 대통령은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내가 취임한 이후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1000억 달러(134조1000억 원)를 투자했다"며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유치한 투자 규모를 언급했다.
이에 대해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실은 미국 기업의 투자 규모가 59억 달러에 이른다고 홍보했지만, 한국 기업들이 바이든 정부 들어 10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한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결과"라고 비판했다.
미국 기업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우리 기업에는 손해를 끼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반도체법 등 경제 이슈와 관련한 구체적인 해법을 도출하지도 못했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정상 간에는 이미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밝혔다. 양 정상 간에 한국 기업의 부담과 불확실성을 줄여 준다는 그런 방향에 대해서 명확하게 합의를 했고, 바이든 대통령이 이런 데 대한 지침이 확인됐다"며 "반도체법에 대한 NOFO(보조금 지급 세부조건) 관련된 부분이라든지, 그다음에 반도체 수출 통제 등 남은 쟁점들도 긍정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앞으로 유의미한 해법이 나올 수 있다고 '가능성'을 남겼다.
미국 정보기관의 우리 대통령실 도청 문제에 대해선 윤 대통령이 전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미 순방 중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 정부의 도청 및 기밀유출에 대해 "이 사안은 한미동맹을 지탱하는 철통같은 신뢰를 흔들 이유가 없다"며 "한미동맹은 자유와 같은 가치 공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또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최근에 미국이 한국을 도청했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측의 약속이라든가 하는 언질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미국 측 기자 질문에 "지금 한미 간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소통하고 또 필요한 정보를 공유해 나가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도 조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국가 간의 관계에서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변수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 시간을 두고 미국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충분히 소통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도청에 대해 항의했냐는 질문에 '소통하고 있다'는 엉뚱한 답변을 한 것이다. 미 정부의 이번 사안에 대한 조사가 도청이 아니라 '기밀문건 유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소통한다는 것은 사실상 관련해 아무런 항의나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민주당 쪽에선 "미국의 대통령실 도청 의혹에 대해 사과 요구는커녕 아예 '면죄부'를 주고 앞으로 계속해도 아무런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며 "대한민국 주권을 포기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한편 이번 방미 기간 윤 대통령의 일정에 대부분 함께 참여한 김 여사는 별도로 △벨라 바자리아 넷플릭스 최고콘텐츠책임자(COO) 접견 △보훈요양원·국립어린이병원 방문 △북한 인권운동가 간담회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남편인 더글러스 엠호프와 환담 △문화체육관광부·스미스소니언 재단 양해각서 체결식 △보스턴미술관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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