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박숙현 기자]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 적 없는 (상황에서) 본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에 심히 유감을 표한다."(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어떠한 사실 확인 요청이나 사전 조사 없이 들이닥친 황당한 압수수색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
2년 전 전당대회에서 불법 정치자금 전달 혐의로 사무실과 자택 압수수색을 받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일제히 '유감'을 나타냈다. 윤관석 민주당 의원은 "본인이 거론되었다는 것조차 황당하기 짝이 없다"고 했고, 이성만 의원도 "그동안 보도된 의혹들과 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결백 호소와는 달리 의심쩍은 정황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어 민주당의 고민을 깊게 한다. 압수수색 영장에 따르면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총 9400만 원 규모의 불법 자금이 오갔고 두 의원은 돈 전달 공모자였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 휴대전화 포렌식 과정에서 나온 녹취록이 돈 봉투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전 부총장은 최근 검찰에 녹음 파일 내용을 인정하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돈봉두 전달 공모자'로 지목된 두 의원은 입을 모아 "검찰의 비상식적 야당탄압 기획 수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동료 의원들의 사법 리스크에 당이 대응해온 '매뉴얼'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보여준 '야당탄압 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당사자가 결백을 호소하고 있는 만큼 정치 검찰과 끝까지 싸워 두 의원의 무고함을 밝히는 게 수순이다. 이를 위해 국회 앞 본청 계단 앞에서 소속 의원, 당직자, 당원들 할 것 없이 모두 불러 모아 '돈봉투 의혹 왜곡 윤석열 정치검찰 정권 규탄대회'를 속히 여는 것은 물론이고 1인 사위와 삭발식도 단행하고, 장외 투쟁도 나서야 할 차례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잠잠하다. 당 안팎에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대형 악재'로 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기존의 '야당 탄압 대응' 매뉴얼이 작동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할 총선이 1년도 채 안 남았는데 '돈 봉투당' 꼬리표를 달게 생겼다. 국민의힘은 2008년 전신인 한나라당 당시 돈봉투 파문으로 '차떼기당' 오명을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다. 이번 돈봉투 사태 1심 판결이 총선 직전 나올 경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 자정 능력마저 잃었다는 점이다. 당내 중진 소신파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검찰의 야당 인사 수사 보도만 나오면 자동반사적으로 당 지도부를 따라 "야당 탄압"을 외치다 보니 판단이 무뎌진 게 아닌가 싶다. 이해찬 상임고문은 '돈봉투 의혹' 관련 압수수색 보도가 나온 당일에도 광주의 한 강연에서 "민주당만 있어도 절대 우리 정치는 이제 안 썩는다"고 자평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민주당 입장에서 윤석열 정부의 '검찰 수사'란 "국가 지도자로 성장하기 위해 견뎌내야 하는 역사적인 과업"일 정도로 명예롭기까지 하다. 민주당 지지자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고작 9400만 원 갖고 그러나"라는 취지의 글들도 다수 올라왔다.
민주당 지도부는 사태 초반 미국 도청 의혹 사태를 덮기 위해 검찰이 국면전환용 기획 수사에 나선 것 아니냐며 역공에 나서기도 했다. 이후 뒤늦게야 자체적으로 '진상규명' 하겠다고 밝혔다. 16일 세월호 참사 9주기 기억식 행사 참석 후 기자들의 관련 질의에 이 대표는 침묵했고, 박홍근 원내대표는 "좀 지켜보자"면서 "때가 되면 내부적으로 논의해서 말씀드리겠다"고만 했다.
이번 사태는 이 대표 리더십의 근간을 강하게 흔들 수도 있다. 2021년 해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송영길 전 대표는 당시 0.59%포인트 차로 '친문계' 홍영표 의원을 제치고 당권을 잡았다. 초반 송 대표가 선두를 달렸으나 4월 말부터 홍 의원이 친문계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맹추격하는 모양새였다. 특히 돈 봉투 전달 주요 대상이었던 '대의원' 투표(45% 비중)에서 1.5% 차이(215표)로 앞선 바 있다. 송 전 대표 체제에서 이 대표가 당 대선후보로 당선됐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분석까지 고개를 든다.
송 전 대표와 이 대표와의 관계성은 이전부터 꾸준히 지적받아 왔다. 대선 경선 시절 송 전 대표가 사실상 이 대표를 지원사격한다는 '이심송심'(李心宋心)' 논란이 있었고, 지역구 인천 계양을을 이 대표에게 물려주면서 정점을 찍었다. 당 내부에선 송 전 대표를 즉시 귀국시켜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이 대표 결단이 주목된다.
기존처럼 '야당 탄압' 대응 기조라면 즉시 매뉴얼을 작동해 총선 악재가 되기 전에 의혹들을 강하게 반박해야 할 것이고, '야당탄압' 매뉴얼을 버린다면 이번에야말로 철저한 당 차원의 진상조사로 당사자들을 처분해야 한다. 당직 개편 수준이 아닌 전면적인 '쇄신작업'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대표와 측근 역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수사 또는 재판 중인 상황이라 이 과정에서 당 대응의 형평성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검찰 수사 때마다 숱하게 외쳤던 '야당 탄압' 구호가 민주당에 무거운 짐으로 되돌아온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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