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조성은 기자] 초과 생산된 쌀의 정부 매입을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여당의 반발 속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할 방침이다. 농림축산식품부도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기로 하면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무게가 실린다. 야당은 이에 대안 입법으로 맞설 것으로 보이며 여야 간 2라운드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고 재석 266명에 찬성 169명, 반대 90명, 기권 7명으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전량 매입하는 이른바 '시장격리' 조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표결에 앞서 법안 제안 설명에서 김성환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유례없는 쌀값 폭락의 원인은 현행법에 쌀 시장 격리 실시 기준이 법제화 있음에도 임의조항이라는 한계로 정부가 제때 시장에서 격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쌀농사가 흔들리면 농업인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의 식량 주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신정훈 민주당 의원은 "역대 어느 정부도 쌀값에 대해 완전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바보 같은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며 "쌀의 과잉 생산을 적극적인 재배 면적 관리와 생산 조정을 통해 해소하고, 일시적 과잉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시장 격리로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은 "시장 격리 의무화를 하면 재배 유인 증가로 쌀의 구조적 공급과잉을 심화시키고 시장기능을 저해해 정부의 재정 부담을 가중하게 된다"면서 "미래 농업 투자 의욕을 감소시켜 경쟁력 저하라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악법"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권의 쌀값 하락 책임을 무책임하게 전가하기 위해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법안을 날치기 처리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본회의에 앞서 열린 의원총회가 끝난 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본인들이 집권할 때는 전혀 하지 않다가 인제 와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한다"며 "안 그래도 쌀이 남아도는 데다 (양곡관리법 시행 시) 매년 1조 원이 넘는 매입을 하고 10분의 1을 내다 버릴 수 있다. 농업을 파괴하고 정부를 곤란에 빠뜨리는 방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기현 대표도 의원총회에서 "양곡관리법·방송법 등 (민주당) 자신들만의 도그마에 빠진 여러 본회의 직회부 법안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자기들에게 정치적 득이 된다는 계산"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민주당은 쌀값 안정화를 목표로 양곡관리법을 추진해왔으나 정부·여당은 양곡관리법이 쌀 초과 생산을 막지 못하고 국가 재정에도 부담이 된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해 왔다. 민주당은 지난해 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단독으로 이를 직회부했다.
당초 민주당이 발의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쌀값이 평년보다 5% 이상 하락할 때 시장격리가 자동 발동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김진표 국회의장은 초과 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쌀값이 5~8% 하락할 때 정부가 의무 매입에 나서는 내용의 중재안을 내놓았다. 벼 재배면적이 증가하면 시장격리를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 재배면적이 증가한 지방자치단체에 페널티를 주는 내용도 새로 포함됐다. 민주당은 이를 수용해 수정안을 내놨으나 여당이 거절하면서 합의가 불발됐다.
이어 김 의장은 초과 생산량 기준을 3~9%, 쌀값 하락 기준을 5~15%로 높였다. 그러면서 그러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국회가 정부에 매입을 권고하고 정부가 권고를 수용하지 않으면 그 사유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의무 매입 조항이 남아있는 한 본질적으로 민주당안과 같다며 거부했다. 민주당은 이미 1차 중재안도 취지가 크게 훼손됐다는 지적이 이어진다며 2차 중재안에는 난색을 보였다.
민주당은 지난달 27일 본회의에서 법안을 처리하려 했으나 김 의장의 중재로 한 차례 연기됐다. 김 의장은 당시 "3월 첫 본회의까지 합의에 이르지 않으면 민주당 수정안으로 표결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표결 이후 기자들과 만나 "입법 폭력"이라며 "민주당이 여당일 때는 이 법안이 농업에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서 통과시키지 않다가 지금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통과시키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힘은 법안이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될 경우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주 원내대표는 본회의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를 열고 "민주당이 집권 5년 동안 다수 의석을 가지고 이 법안을 처리하지 않은 건 국가 재정 부담이 명백했기 때문"이라며 "5년간 하지 않다가 정권 바뀌고 1년 만에 (강행하는 것은) 새 정부에 부담을 주고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양곡관리법은 절대 수용 못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께 거부권, 소위 재의요구권을 강력히 건의드릴 것"이라고 밝혔다.
김미애 국민의힘 원내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법률안 재의요구권을 규정해 우리 국회가 단원제로 운영되어 국회를 지배하는 다수 정당의 의회 독재 횡포에 의한 급진·졸속·위헌 입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발동으로 양곡관리법은 가중된 다수결로 국회 의사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림축산식품부도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이날 법안이 가결된 뒤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에 대해 그 뜻은 존중하지만 이번 법률안은 부작용이 너무 뚜렷하다"면서 "수정안이 일방적으로 처리된 점에 대해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깊은 유감과 허탈함을 금할 길이 없고, 그동안 계속 밝혀왔듯이 수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률안에 대한 재의 요구안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도 이날 기자들에게 문자를 보내 "법률 개정안이 정부에 이송되면 각계의 우려를 포함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숙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사례이자 지난 2016년 5월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 상임위의 상시 청문회 개최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에 행사한 이후 7년 만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법률안에 대한 재의결에는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고 이에 미달하면 법안은 폐기된다. 여당이 3분의 1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법안은 폐기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서 민주당에서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고려해 새로운 관련 법안 추진을 예고했다. 김성환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양곡관리법에 대해 "2020년 쌀 변동직불금제를 직불금으로 전환하며 정부가 농민들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인데 중간에 기획재정부가 다른 논리로 이행하지 않아 온 것에 대한 추가 안전장치가 반영된 것"이라며 "(거부권 행사 시) 또 다른 안전장치를 만드는 입법을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신정훈 의원도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쌀에 대한 종합적인 대안들을 다시 낼 것"이라며 "식량자급률 법제화, 쌀 재배면적 관리 의무화 등으로 원래 민주당이 추진한 양곡관리법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양곡관리법을 포함해 민주당은 중점 추진 법안들을 본격적으로 본회의에 직회부하면서 국회는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지난 21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방송법 개정안'을, 지난달 9일엔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간호법 제정안' 등 7개 법안 직회부를 의결했다. 상임위를 통과한 법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되는데, 법사위로 간 법안이 이유 없이 60일 이상 처리가 지체될 경우 소관 상임위에서는 본회의 부의를 직접 요구할 수 있다.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외에도 노란봉투법, 안전운임제, 쌍특검 등도 직회부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