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허주열 기자] 윤석열 정부가 지난 6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을 공식 발표한 이후 거센 후폭풍이 일고 있습니다. 가해자인 일본 기업은 빠지고, 우리나라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조성한 기금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불한다는 '제3자 변제' 방식이 '굴욕적'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피해자, 야당,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해법은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법과 원칙,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선택이라는 비판도 거셉니다.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미쓰비시중공업·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한 정부 해법엔 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는 없고, 사과도 없었습니다.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방안을 해법이라고 제시한 것입니다.
◆사법부의 최종 결론 무시한 행정부
우리 헌법 제6조에는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101조에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며, 법원은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법원으로 조직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내린 판결은 삼권분립체제인 우리나라 사법부의 최종 결론으로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 및 가해 일본 기업들은 박정희 정부 시절 체결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하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시절 한국에 대한 배상 책임이 완전히 종결됐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대법원 판결을 부정해왔습니다. 나아가 2019년에는 보복 조치로 '수출 규제' 조치를 취하면서 사법적·역사적인 판결을 '경제 문제'로 비화시켰습니다. 이것이 우리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급격히 경색된 배경입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의 판결문을 살펴보면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강제동원 등에 대한 법적 배상 자체도 인정하지 않았기에 해당 협정에 개인들의 손해에 대한 배상이 포함된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적시했습니다.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일본 측의 주장이 아니라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따르는 게 상식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6일 이번 해법에 대해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오늘 이 시점에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양국 정부가 각자 입장을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대법원의 청구권협정 해석을 부인하면서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의 1항과 3항, 그리고 합의의사록에 보면 강제징용 문제를 포함해서 한국 정부가 앞으로 일본이 우리에게 지불할 5억 불의 보상금(무상 3억 불, 차관 2억 불)을 사용해서 우리 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해서 지원금을 수령하기로 한다는 약속이 적혀 있고, 이 약속이 53년 동안 지켜져 왔던 것"이라며 "우리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어쨌든 국제법적으로, 그리고 1965년도 한일 양국 정부의 약속에 비추어 보면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은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합의를 어긴 것이라는 결론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대법원 판결보다 1965년 청구권협정이 더 우선한다는 일본 측의 주장을 '일본 정부의 한계치'라고 언급하면서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를 두고 최종건 전 외교부 제1차관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것은 법리적인 문제, 우리 헌법체계의 문제"라며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최고인 대법원이 민사소송에 대해서 판결을 내린 것이고, 일본 기업의 사죄와 그리고 배상 조치가 있어야 된다라고 했는데 행정부가 나서서 외교적이라고 하는 문제 때문에 사법부에 내린 판결을 흔들거나 무효화시키는 행위를 하면 그것은 헌법체계를 유린하는 상황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법치주의를 흔드는 해법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부분은 피해자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제동원 배상 확정판결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리인단에 따르면 이번 판결과 관련해 생존해 있는 피해자 3명 모두 정부가 마련한 해법에 '반대'하고 있으며, 유족들 중에서도 정부 해법에 동의한 이는 절반 이하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많은 유족분들께서 우리 정부의 구상에 대해서 이해를 표해주셨고, 또 '상당수'의 유족분들은 이 문제가 조속히 종결되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주셨다"는 박진 외교부 장관의 발표와도 상반됩니다. 정부가 피해자 및 유족의 의견을 왜곡해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해법을 밀어붙였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7일 오후 국회 앞에서 열린 비상 시국선언에서 "제가 95살이나 먹어서 지금까지 억울할 때는 이참이 처음"이라며 "어디 윤석열(대통령)은 한국 사람인가, 조선 사람인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모르겠다. (우리 기업이 기금을 출연하는 방식으로 마련한) 돈은 죽어도 안 받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제 식민지배 피해자에게 이런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피해자 "대통령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모르겠다"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이번 주 주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윤석열 정부 강제동원해법 무효 범국민 대회'를 열고 범국민 서명운동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윤 대통령은 이번 해법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6일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 "그동안 정부가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과 미래 발전에 부합하는 방안을 모색해 온 결과"(7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20세기 초 36년간의 불법적인 한반도 식민지배라는 '과거'와 오늘날까지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현재)를 덮고, 가해자의 입장만을 최대한 반영해서 한일관계가 '미래'로 제대로 나아갈 수 있을지, 또한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일본에 어떤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동안에는 북한의 핵 위협, 그리고 동아시아의 안보에 있어서 선별적으로 우리가 안보 협력을 꾀해 왔다면 오늘 이후부터 양국 국민과 정부가 본격적으로 신뢰를 회복하고 정치, 안보,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미래의 청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당장 이번 양보로 우리가 얻은 가시적인 성과는 사실상 불확실한 '미래' 말고는 없는 셈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윤석열 정부의 해법에 대해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한 역사 인식에 관해 '역대 내각'의 입장, 이 전체를 계승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일본의 역대 내각 중 과거사를 사과한 내각도 있지만, 아베 신조 내각처럼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왜곡 발언으로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내각도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부장 수출 규제는 우리 정부가 먼저 WTO 분쟁 절차를 중단한 이후 협상을 통해 해제를 결정할 방침입니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의 해법은 법치주의, 피해자 중심주의를 벗어나 일본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만들어졌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장 정부의 해법을 비판하는 피해자들이 제3자 변제 방식의 배상금 수령을 거부하고, 가해 기업의 국내 재산 강제청산 등의 법적 조치를 이어가면, 정부의 해법을 둘러싼 논란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그간 일본 정부 및 가해 기업과 싸워왔던 피해자들이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이제 그만하라'는 정부와 보수진영 여론전에 밀려 2차, 3차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합니다. 일본과 미래를 논하기에 앞서 "피해자를 존중한다"는 대통령과 정부의 말이 말로만 그치지 않고 진정성을 갖고 행동으로 보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