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조채원 기자] "배 만드는 공장에서 잔심부름을 했지. 안하면 죽인다고 하니 죽기 싫으니까 하고. 폭격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어. 도망가다 붙잡혀도 다 죽어." -임원재, 1942년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로 강제동원(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귀신 될 뻔했네 中)
"오사카에 있는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고 그랬다고. 와 보니 후쿠오카현 야하타 제철소인걸 알았어. 월급은 무슨. 돈은 구경도 못 했어. 밥만 먹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했어." -이천구, 1942년 일본제철주식회사 야하타제철소로 강제동원(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귀신 될 뻔했네 中)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무수한 한국인들이 일제에 의해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했고 생명·신체·재산 상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 3월까지 일본과 사할린, 태평양 군도 등에 강제동원된 한국인은 최소 76만7000여 명에 이른다. 이마저도 일제 패망 직전이었던 1945년 4월 이후 인원은 제외된 것으로 매우 축소된 숫자다.
과거사 문제 해결은 한일 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결 과제다. 그러나 104주년 3·1절을 맞은 이날까지도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은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제시한 강제동원 배상 문제 해법에도 일본은 묵묵부답이다.
◆한일 정부, 배상 방안 두고 입장 차…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가 공식화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은 '제3자를 통한 대위변제' 방식이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혜택을 입은 한국 기업들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에 기금을 출연해 강제동원 피해자등에게 대신 배상금을 지급한다. 그리고 전범 기업이 향후 재단 기금 조성에 자발적으로 기여하게 하거나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배상금을 전범 기업에 받아내는 방식(구상권 청구)으로 배상 재원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앞서 한국 대법원은 2018년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기업 2곳에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1인당 1억원 또는 1억50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부 차원의 협정과 노동자 개인의 손해해상 청구는 별개라는 인식 하에 내려진 판결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범 기업이 피해자 배상에 직접 참여하는 데 부정적이다. 이미 피해 배상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한국 측에 제공한 총 5억달러 상당의 유·무상 경제협력을 통해 모두 해결됐다는 것이다. 한국 대법원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데다 구상권 포기까지 언급하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죄 방식도 쟁점이다. 한일 정부는 현재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죄·반성을 언급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방향으로 협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피해자 측에서는 과거 담화를 계승하는 수준이 아닌 강제동원에 대한 명시적 사실 인정과 사과를 요구한다.
◆강제동원 협상 줄다리기 계속…'해법' 두고는 의견 분분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둘러싼 한일 간 줄다리기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의 만남 후 향후 일본 측과의 협의 일정에 대해 기자들에게 "뮌헨 회담에서 우리 입장을 충분히 일본 측에 설명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의 회담 후 "일본 측에 성의 있는 호응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할 만큼 했으니 한일관계 개선을 바란다면 일본도 호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박진 장관이 이날부터 이틀에 걸쳐 열리는 G20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면서 한일 외교수장이 만나 강제동원 문제의 최종 접점을 모색할 기회는 미뤄진 상태다.
전문가들은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 참여 여부를 해법 마련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국민대 일본학과 이원덕 교수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 반성 표명과 전범 기업의 참여 이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하는데 문제는 일본이 전혀 호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현재 정부안은 현실적이라고 평가한다"며 "일본 측도 직접적 사과 대신에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의 결단 시기는 4월 한미정상회담, 5월 G7 회의 초청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이 한국이 원하는 수준만큼 호응하지 않고, 국내 반발 여론이 일더라도 정부가 한일관계 정상화에 따른 이익에 무게를 두고 결정할 지, 계속해서 일본과의 긴장 관계를 걸림돌처럼 유지할 지 고민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민간 차원의 해결을 유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우교수는 통화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일본이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업(전범 기업)과 개인(피해자 측)이 화해를 돕는 방식으로 정부가 협력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 정부가 당면한 현안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십년 간 걸린 문제를 너무 급하게 해결하려는 것 같다"며 "전범기업의 배상 참여를 일관적으로 반대해 온 일본의 전향적 입장 전환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3자 대위변제 방식을 추진하는 건 결국 배상도, 사과도 안 하겠다는 일본 주장을 수용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