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23일은 노회찬재단에서 정한 故 노회찬 전 의원 추모 기간 마지막 날이다. 정의당은 어느 때보다 분주한 모습이다. 지난 20일 한국인터넷신문협회가 주최한 '인터넷신문의 날 기념식' 행사장에서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초청받은 다른 정당 정치인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가 먼저 자리를 떴다. 노 전 의원 4주기 추모토론회와 민생해법 찾기 간담회, 금속노조 총파업 서울 결의대회 일정이 앞뒤로 연이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일정 탓에 다소 초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단상에 오른 그는 "비대위가 아닌 정당이 없다" 라는 자조섞인 농담으로 축사를 시작했다. 정말 그렇다. '우상호 비대위 체제'의 더불어민주당,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체제'의 국민의힘까지 원내 3정당 모두 다소 위태로운 비대위 체제로 굴러가고 있다. 그러나 거대 양당의 집안 싸움에 가려 있을 뿐,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정의당이야말로 가장 비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정의당은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전 대표가 2.37%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한 데 이어 6·1 지방선거에선 총 191명의 후보자를 내고도 광역은 물론 기초 지자체장을 1명도 배출하지 못 했다. 7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는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이는 1명의 기초단체장을 배출한 '통합진보당 옛식구' 진보당보다 못한 성적표다. 이후 여영국 대표 체제가 물러나고 이은주 비대위와 '10년 평가위원회'가 출범했다. 9월께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고 당명까지 바꾸는 '재창당 수준'의 혁신안을 구상 중이다.
결연한 의지와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다.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다수의 후보를 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후보 지원금이 빚으로 돌아왔다. 올해 정의당 회계보고서(3월 29일 기준)에 따르면 35억6400만 원 상당의 대출을 포함해 39억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이 때문에 당직자들의 월급 줄 돈도 부족해 의원들이 총 1억2000만 원을 사비로 메우기로 했다고 한다. 고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현재 서울 여의도에 있는 당사 이전도 계획 중이다. 다음 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으면 숨통은 트이겠지만 그때뿐일 것이다.
당 재정뿐 아니라 원내 전략도 위기다. 여야가 합의로 구성된 국회 '민생경제안정 특별위원회' 비교섭단체 몫에 정의당이 배제되고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지명됐다. 22일 국회 원 구성 결과, 상임위도 6명 중 절반은 1위 희망 상임위에 배정되지 못했다. 정의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은 정의당 원내 지도부나 해당 의원들과도 단 한 마디 협의나 조정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다른 상임위원회로 배정해버렸다"며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이처럼 국고보조금 지원이나 상임위 배분 등 '비교섭단체'로서 겪는 차별은 정의당의 위기를 초래한 구조적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가장 큰 위기는 역시 '내부'에서 비롯됐다. 지난 대선 이후 만난 정의당 전 당직자 A는 당 지도부가 대선은 평가할 생각도 없이 눈앞에 닥친 지선만 생각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최근 다시 만난 A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정의당 위기의 변곡점으로 꼽히는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내부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는 "조국 전 장관 임명에 찬성할지가 중요한 사안이라 지도부에서 아래 직급의 당직자들에게도 의견을 수렴했었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냈지만 위에서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 이후로 실망한 일부 당직자들은 당을 떠났다"고 전했다. 이같은 의사결정이 쌓이고 쌓여 당이 망하는 길로 들어섰다는 취지로도 말했다. '당의 간판' 심상정 의원도 최근 "조국 사태와 관련한 당시 결정은 명백한 정치적 오류였다. 이 사건은 제게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이라고 거듭 반성했다.
야권에선 "제 리더십은 소진됐다"고 밝힌 심 의원이 정계 은퇴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당 일각에서도 '비례대표 국회의원 총사퇴'를 압박하고 있다. 인적 쇄신만큼 눈에 띄는 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혁신 방향에 대해 정의당 사람들은 당명이나 인적 쇄신은 부차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당 위기 원인으로 "이념과 계파에 빠져 국민 효능감을 무시했다" "당의 주축인 '노동' 대신 '젠더'에 치중했다" "진보 세력과의 연대를 거부하면서 폐쇄성이 짙어졌다" 등이 거론되면서 정치노선과 정체성 논의가 활발하다. "진보 정당 1세대의 실험이 끝났다고 본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23년간을 버텨왔지만, 우리는 미래를 열지 못했다"는 심 의원의 자성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이는 10년 전 통합진보당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부터 제기된 문제라 태생적인 한계라 할 수도 있겠다.
바깥에서 지켜본 처지이긴 하지만 정의당이 현 위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의 정의당은 예민하고 폐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상황은 엄중하게 인식하되, 대응에 여유와 기대가 담겼으면 좋겠다. '유머의 정치인' '언어 유희왕'으로 불렸던 노 전 의원의 태도를 돌이켜봤으면 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방송 토론에 나왔던 노 전 의원은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라거나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와 같은 해학적인 말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말뿐이 아닌 행동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스스럼없는 친화력을 보였다고 한다. 진보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개방성을 잃지 않았던 정치 철학이 기반에 깔린 게 아니었나 싶다.
원내 제3정당의 몰락은 정의당만의 위기가 아니다. 대표 진보 정당이 무너진다면 대한민국 정치권의 양극화 체제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국민은 또 다른 선택지를 잃게 된다. 정의당이 부디 조급함을 내려놓고 새 길을 찾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