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재명아빠는 우리가 지키자."
20대 대선에서 패했지만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향한 지지층 열기가 심상찮다. "이재명을 지켜야 한다"며 당 지도부를 향해 집단행동에 나서는가 하면, 아이돌 팬클럽처럼 이 고문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며 이른바 '덕질' 중이다. 이들의 활약이 향후 이 고문의 정치 재개 행보에 활력을 불어넣을지 주목된다. 다양성이 중시되는 정치권에서 '팬덤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정치권은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이 고문 간 득표율 차가 0.73%포인트에 그쳤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예상 밖 결과를 견인한 건 20·30 여성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후의 부동층이라 불리는 이들이 '역대급 비호감' 대선에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가 선거 막판 이 후보 쪽으로 쏠렸다는 것이다.
실제 여론조사기관 '칸타코리아'의 2월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 결과(조선일보 의뢰, 2월 24~25일 기간, 1007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를 살펴보면 20대 여성 중 지지 후보가 '없다'나 '모르겠다'고 답한 비율은 45%, 30대 여성은 22.5%다. 20대(25.7%)·30대(16.1%)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당층 비율이 높았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대선을 앞두고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고 젊은 여성층의 결집력이 약하다고 분석했던 이유다. 하지만 방송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30대 여성 투표율이 2030 남성 투표율보다 높았고, 이 가운데 이 고문은 20대 여성의 58.0%, 30대 여성의 49.7%의 표를 얻은 것으로 예측됐다. 전문가들은 20대 대선이 분산돼 있던 2030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가 본격화한 선거라고 평가한다.
2030 여성 지지층은 대선 이후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선 직후인 지난 10일 개설된 이재명 팬카페 '재명이네 마을'은 7일 만에 회원 수 11만 명을 돌파했다. 해당 팬카페는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든 비공식 카페다. 지지자들은 이 고문의 대선 출마와 패배 과정, 과거 SNS 글 등을 공유하고, 확대 재생산하며 '팬덤 문화'를 형성하는 모습이다.
과거 정치인 팬클럽이 상대 후보를 향한 '증오와 배격'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들은 이 고문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 고문의 과거 온라인 팬클럽인 '손가락 혁명군'의 호전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건전한 토론문화, 혐오 표현 삼가, 사적 친목 금지, 타 정당 및 인물과 커뮤니티 네거티브 지양 등을 담은 운영 정책이 눈에 띈다.
또 아이돌 덕질(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파고드는 행위)처럼 이 고문의 말투와 행동을 유쾌한 이미지로 승화해 소비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이곳에선 이 고문이 재덩이(재명복덕이), 친칠라(이 고문을 닮은 동물), 이잼(이재명의 줄임말), 아빠로 불린다. 이용자들은 자신을 '개딸'로 칭한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아버지역 배우가 딸들을 '개딸'로 부른 것을 차용한 것으로, 이 고문이 2006년 블로그에 '딸에게 아빠가 필요한 100가지 이유'를 쓰면서 딸이 갖고 싶었다고 언급한 글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대선이 끝났지만 쌍방 소통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고문에게 직접 '아빠'라며 응원 문자를 보내고 이 고문의 답장 문자를 인증하는 글들도 쏟아졌다. 이 고문도 카페에 '갤주 이재명입니다'라는 닉네임으로 한 차례 글을 남기고, 현재까지 22회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활동은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민주당 입당 러시로 이어지고 있다.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은 17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젊은 청년 당원들이 지금 선거가 끝나고 일주일 동안 벌써 한 12만 명 정도가 들어왔다"며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활동도 빠르게 실행하는 모습이다. 차기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투표권이 있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이재명계로 분류되는 박홍근 의원에 대한 투표 독려 문자를 보내는가 하면, 지역구 민주당 의원 사무실에도 문의가 쇄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한 의원은 <더팩트>에 "당에도 찾아오고 지역구 사무실에도 엄청 많이 오더라. '지금까지 정치 안 했던 게 억울하다'고 한다. 30대 여성들이 제일 많이 온다"면서 "잘 됐다고 본다. 그런 분들이 좀 움직여줘야 밑바닥 정서가 바뀐다"고 이들의 활동을 긍정 평가했다. 정치인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소극적인 행위에서 벗어나 시민의 참여를 촉진하고 대의정치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20·30여성들의 팬덤화는 정치 재개가 예상되는 이 고문의 향후 행보에 적지 않은 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이 '정청래의 국회의원 사용법'에서 "국회의원을 움직이는 최고 단위 정치 행위는 팬클럽이다"라고 할 정도로 적극 지지자들이 정치권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지난해 4·7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한 뒤 일부 의원들이 문재인 정부 쇄신론을 주장하자 문자폭탄을 보내 목소리를 막거나, 다음에 치러진 5·2 전당대회에서 친문 의원들이 당 지도부로 선출되도록 역할을 했다. 당내에선 '성찰의 기회를 놓쳤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치인 팬덤 문화가 거론될 때마다 혐오와 분열 조장은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팬덤 문화의 대표적인 부작용 사례 중 하나가 '아산 반찬가게 사건'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충남 아산 전통시장의 한 반찬가게를 찾아 "(경기가) 좀 어떠세요"라고 묻자 가게 주인이 "(요즘 경기가) 거지 같아요. 너무 장사 안 돼요"라고 답한 것을 두고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공격적으로 비난하고, 가게 불매운동을 했던 일이다.
전문가들은 정치인이 팬덤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며, 지지층 역시 맹목적 지지는 지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모바일 문화 이후 정치인을 열렬히 지지하는 문화가 강화됐는데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며 "20·30세대의 (이 고문) 지지는 윤석열이라는 상대 진영 후보의 발언이나 행동 때문에 반사효과적인 측면이 있는데, (지지가) 유지되려면 이 고문이 정치 콘텐츠를 어떻게 잘 보여줄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팬덤을 유지할 때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콘텐츠를 다양하게 만들고, 절충할 건 절충하는 등 포용력을 길러야 한다. 또 팬덤 안에서도 목소리를 어느 한 쪽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 고문은 대선 패배 이후 장기간 잠행 모드에 돌입했던 역대 낙선자들과 달리 연일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지난 11일 SNS에 공개 메시지를 낸 후, 14일 자신의 블로그에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172명 의원들은 물론 80여 명의 원외 지역위원장들에게도 일일이 선거 지원 감사 인사 전화를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6일에는 대선 낙선 인사를 하던 중 차량에 치여 숨진 민주당 시 의원 출마 예정자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