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의 눈] '여성 운동가' 남인순의 침묵…'소신'과 '책임' 사이

여성 운동가 출신의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24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성추행 폭로 가능성에 언질을 줬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소극적 태도를 보여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선화 기자

헷갈릴 땐 '국민에 미칠 영향' 우선 생각해야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 대표 취임 이후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유명한 고전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자주 언급해왔다. 본인 스스로도 "지난 30여 년간 늘 막스 베버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다. 특히 4·15총선 전 같은 당 의원들에게 영입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할 때, 또 총선 압승 다음 날 '책임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면서 이 대표는 막스의 "정치는 책임감과 열정,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문구를 인용했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문제를 다룬다. 전자는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고 그에 따라 책임질 줄 아는 태도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신념을 지나치게 고집할 경우 현실과 동떨어져 무책임해질 수 있다. 또 기계적으로 결과만 따진다면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이때 '최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균형을 찾는 능력이 정치인에게 필요하다는 게 베버가 말한 핵심이다.

남인순 민주당 최고위원의 최근 행동을 보면 다시 정치인의 소신과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남 최고위원은 24일 당 회의에서 "(박원순 전 시장에게) 피소 사실을 알렸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추측성 보도를 삼가 달라"고 말했다. 성추행 피소 사실을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알렸다는 의혹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반박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는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박 전 시장에게 성추행 관련 언질을 줬는지 등에 대해 "드릴 말씀이 없다"며 자리를 피했다. 남 최고위원은 박 시장 사태가 터지기 전 잡았던 기자들과의 식사 약속도 취소한 상태다.

여성 운동가 출신 남 최고위원은 박 전 시장과 인연이 깊다. 지난 2016년 5월 9일 안심보육 결의대회에서 악수하는 박 시장(오른쪽)과 남 최고위원. /더팩트 DB

남 최고위원은 지난 9일 박 전 시장과 통화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경찰이 그를 참고인 대면 조사하려 했지만, 응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민주당 여성의원 전원이 박 시장 사태와 관련해 낸 성명서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고집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여성계에선 '여성 운동가 남인순'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남 최고위원은 강한 페미니즘 성향으로 유명했다. 그가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대선 캠프에 '여성본부장'으로 합류했을 때 친문층이 '남성 지지자가 이탈한다'며 우려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최고위원으로서 아침 회의도 빠지고 박 시장의 장지까지 따라나섰다. 이에 대해 같은 여성 운동가 출신 민주당 여성 의원도 사석에서 기자와 만나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라고 했다. 다만 이 의원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박 시장마저 그런 일이 터지니 '미치지 않고서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믿을 수 없었다. 가까웠던 남 최고위원은 오죽할까 싶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대신 해명했다.

짐작하건데 남 최고위원은 박 전 시장의 여성운동 행보와 소신을 무척 아끼고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박 시장은 우리나라에서 1993년 법적으로 최초 제기된 성희롱 사건을 대리해 피해자에게 정신적 보상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대표적인 여성 친화 정치인이었다. 성희롱 사건이 무고로 드러난 경우들을 가까이서 접하며 '성희롱 사건을 판단할 땐 신중해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이 생겼을 수도 있다. 민주당 한 남성 재선 의원은 기자와의 사석에서 "팩트는 박 시장의 죽음뿐이다.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 건 없다"면서 "정치권이나 언론이 여론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내년 4월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 여부와 관련해 입장을 이틀 만에 바꾸면서 논란이 일었다. 지난 16일 대법원에서 허위사실 공표 혐의 무죄 취지 파기환송 선고를 받은 이 지사. /임영무 기자

하지만 '정치인 남인순'이라면 달라야 한다.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실현하기 어려울 때 책임윤리를 우선하는 게 정치인의 올바른 자세라고 했다. 정치인의 소명이란 결국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 구현보다 국민과 공동체를 위해 좋은 결과를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남 최고위원의 소극적인 태도는 우리 사회에 '위계에 의한 성희롱을 폭로해도 정치권은 하는 일 없이 검찰 수사 결과만 쳐다본다'라는 나쁜 시그널을 전달한다. '성희롱 의혹만으로도 피해자의 옆에 서겠다'는 메시지를 주는 게 정치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무고로 밝혀질 가능성에 대해 법안 발의로 사전 예방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정치인이 '소신'과 '책임' 사이를 고민하며, 후자를 택할 때 생기는 '신기루'도 조심해야 한다. 주로 정치인이 말장난할 때다. 본인의 신념은 A이지만 B를 택해 융통성 있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태도는 정치인의 덕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 대선주자 선호도 2위로 급부상한 이재명 경기지사가 그렇다. 그는 지난 20일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대해 "장사꾼도 신뢰가 중요하다"며 "민주당이 아프고 손실이 크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게 맞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더니 이틀 만에 "어떤 현상에 대해 의견을 가지는 것과 이를 관철하기 위한 주장은 다르다"는 희대의 말장난을 남겼다. 국민이 '민주당의 보궐선거 공천'을 열망하기도 전에 신념을 틀었다.

이와 반대로 금태섭 전 의원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기권하자 당원들로부터 '여당 의원으로서 책임감 없다'는 공격을 받았다. 당도 금 전 의원을 징계했다. 일반 국민 중에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이들이 다수 있었다. 신념과 책임 사이에서 몇 번이고 선택의 기로에 서는 정치인은 부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칠 영향을 치열하게 고민해보길 바란다.

unon8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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