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확대경] '한명숙 살리기' 민주당, 사법개혁 구실 만드나?

친노 대모 격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대법원 유죄 판결은 5년 전 더불어민주당 전신 새정치민주연합도 향후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177석 거대여당이 되자 사건 재조사를 통해 한 전 총리 명예회복과 권력기관 개혁 동력을 얻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17년 8월 23일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해 소감을 밝히는 한 전 총리. /더팩트 DB

거대여당 사법권 침해 우려 목소리도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우리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

2015년 8월 20일 대법원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한명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자 문재인 당시 당 대표가 한 말이다.

문 대표는 "돈을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는데 유죄라는 결론은 국민의 상식, 국민의 정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안타까움과 실망을 넘어 원통하고 참담하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향후 당 차원의 대응을 묻는 질문에 "이번 사건에 관해서 대법원 판결은 종결 판결이다. 야당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나"라며 "근원적으로는 사법의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성 그리고 사법의 독립을 확보해 나가는 정치적 노력들과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상 대법원 판결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5년 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재조사론'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2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재조사 요구 이유로 "수사 당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한 전 총리는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였다"며 "이 사건의 출발에 정치적 의도는 없었는지 주목하게 된다"고 했다. 또 고(故) 한만호 씨 옥중 비망록 등을 거론하며 "의심을 할 만한 정황들이 많다"고 했다. 한 전 총리 유죄 판결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검찰과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 농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7월 출범 예정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다룰 사안인지에 대해선 "검찰, 법무부, 법원 등 해당 기관에서 먼저 들여다봤으면 좋겠다"고 말을 아꼈다. 하지만 박주민 최고위원은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충분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상황"이라며 공수처 수사 대상이 된다고 입장을 밝혔다. 재심 신청 가능성에 대해선 "재심 요건을 갖추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그건 굉장히 나중에 일"이라고 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전날(20일) 국회에 출석해 한 전 총리 수사에 대해 "깊이 문제점을 느끼고 있다"고 동조했다.

법조계는 한 전 총리 사건 재심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여권이 주장하는 한만호 씨 비망록은 이미 사법적 판단을 받아 대법원 판결에도 반영됐기 때문이다.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전 총리 뇌물수수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는 김태년 원내대표. /남윤호 기자

한 전 총리는 2007년 한신건영 대표였던 한 씨에게 대선 경선 자금 명목으로 9억 원을 받은 혐의로 2010년 기소됐다. 한 전 총리 측은 '9억 원 가운데 6억 원은 받지 않았고 3억 원은 비서가 개인적으로 빌린 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 동생 전세금으로 수표 1억 원이 쓰인 사실이 확인됐다. 2015년 대법원 13명 전원은 3억 원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 형을 선고했다.

그런데도 여권이 한 전 총리 사건 재조사를 들고나온 건 일부 매체가 공개한 한 씨 비망록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는 새로운 증거 자료가 아니며 1심 재판 때 이미 사법적 판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대법원 역시 "한만호의 검찰 진술 신빙성은 넉넉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면 재심 청구가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재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유·무죄의 기초가 된 사실에 대한 법원 판단에 중대한 오류가 있을 때 등으로 극히 제한적이다. 또, 새로운 증거가 발견돼야 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한 전 총리 판결의 재심 가능성은 작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민주당의 '한 전 총리 구하기' 최종 목표가 재심보다 한 전 총리의 명예회복과 사법개혁 추진을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전 총리는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총리, 노무현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낸 친노 핵심 원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한 전 총리에게 빚이 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12월 '인적 쇄신'을 주장하는 안철수 의원의 뜻에 따라 복역 중인 한 전 총리에게 당적(黨籍) 정리를 요청했고, 자진 탈당했다.

한 전 총리 사건으로 검찰의 강압 수사와 사법부의 정치적 판결 의혹을 부각해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가라앉은 검찰·사법개혁 동력을 끌어올리려는 의도일 수 있다.

야당은 여권의 한 전 총리 재조사 촉구가 사법부 침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2014년 9월 25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제5회 노무현 대통령 기념 학술 심포지엄 -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 어디로가나‘에서 대화 나누는 새정치민주연합 한명숙 전 총리(왼쪽)과 문재인 대통령. /더팩트 DB

정치권 안팎에선 여권의 '한명숙 판결 재조사' 촉구 움직임이 사법부 침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영석 미래통합당 의원은 이날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민주당이 대신 나서서 이러는 건 총선에서 이겼다고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군림하려는 태도"라고 했다. 같은 당 이준석 최고위원도 "사법부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증거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있나"라고 했다.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은 "증거 조사로 인정된 사실관계를 외면하는 형태가 바로 사법농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도 페이스북에 "거대 여당의 오만과 폭주가 시작됐다"라며 "총선 압승이라는 현실에 취한 무모함인가. 민주당은 '법에 의한 지배'를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에도 그 얘기(한명숙 사건 재조사)를 했었기 때문에 여권에서 문제의식을 계속 갖고 있었다는 여지는 충분하다. 177석 거대여당이 됐으니 얘기를 꺼낼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 전 총리 재조사 요구는) 검찰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고 검찰뿐만 아니라 사법부도 동시에 해당하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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