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하는 정계 원로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니잖나. 대화 타협해야"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20대 국회는 유독 '역대 최악' '사상 처음' '협치 실종'이라는 불명예 수식어를 얻었다. 부끄러움은 왜 국민 몫인가.
선거를 앞둔 국회는 당장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결정해야 할 선거구 획정도 스스로 못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구획정위가 사상 처음으로 시·도별 의원정수, 상·하한 인구 기준을 정해 획정안을 제출했다. 정치권이 어떤 곳인가. 다른 건 몰라도 본인들 밥그릇 앞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손을 잡지 않았던가. 지지고 볶고 싸워도 획정 기준만은 합의해 획정위에 전달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여야가 획정안에 끝내 합의하지 못해, 획정위에 맡겼다.
하지만 획정위가 제출한 획정안에 재의를 요구했고, 두 번째 획정안을 7일에야 확정했다. 이번에도 여야는 언제 싸웠냐는 듯 손을 꼭 잡았다. 그나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한다. 이틀 차이(17대 총선 획정안 확정은 D-37일)로 역대 최악 갱신은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외선거인은 법상 규정된 선거인명부 열람과 이의신청 권한을 침해받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6일(선거일 전 40일)까지 명부 작성을 끝내고 7일부터 11일까지 열람한 국민 중 이의신청을 받아 16일(선거일 30일 전)까지 명부를 확정해야 한다. 그런데 국회에서 획정안이 늦게 통과되면서 선관위는 급한 대로 홈페이지에 7일부터 1차 획정안 명부를 올렸다가 수정한 2차 획정안 명부를 다시 올릴 예정이다. 드물겠지만 1차 명부만 확인하고 이의신청을 안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별 게 아닌 게 아니다.
또, 이번 총선에선 한국 정치 역사상 유례없는 비례 전용 정당이 탄생하게 됐다. 지난해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47석 중 50% 연동률이 적용되는 30석은 각 당의 지역구 의석을 제외하고 배분되기 때문에 거대 양당에 불리한 구조다. 이에 미래통합당이 비례용 위성정당 미래한국당을 통해 비례 30석 사냥에 나섰다. 그러자 한국당을 '가짜·꼼수' 정당이라며 맹공을 퍼붓던 민주당마저 비례연합정당 합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양당제를 허물자는 선거법 개혁의 취지를 짓밟고 있다.
통합당은 애초에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비례정당을 만든다고 해도 그나마 명분은 있지만, 민주당은 왜 비례위성정당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걸까. 정치 원로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17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한 임채정 전 의장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명분상으론 택하기 어려운 대목이긴 한데 정치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1당을 빼앗기면 국회의장부터 상임위원장, 국회운영 주도권이 저쪽으로 넘어가 정권 후반기에 거의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여당 입장에선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정의당 등에서 요구하는 범진보진영 비례연대 방안에 대해서도 민주당은 탐탁치 않을 것이라며 연대가 문제가 아니라 제1당을 빼앗기느냐 마느냐가 핵심이라고 했다.
실제로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는 사실상 이미 포기했다. 하지만 '제1당' 목표 만큼은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비례연합정당 합류로도 1당이 되지 못한다면 현재는 남남인 듯 멀리 하고 있는 정봉주 전 의원과 손혜원 의원의 '열린미래당'과 총선 이후 합체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여야 대치가 심해지고 1당이 되기 위해 몰두하는 더 근본적인 원인은 권력구조에 있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책임제 하에선 정권 창출을 위해 여야가 서로를 헐뜯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9대부터 16대까지 5선을 지내고 새천년민주당(더불어민주당 전신) 대표최고위원을 지낸 정대철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20대 국회가 최악이라고들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럼에도 정치 발전이 더디고 최악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대통령 책임제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 책임제가 있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정당과 못 잡은 정당은 대통령을 만들어놓고 그 다음 날부터 국회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게임해서 다시 정권을 잡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게 되는 제도적인 모순이 있다"고 했다.
연동형비례제 도입과 함께 정치 개혁의 한 축이었던 권력구조 개편 논의가 함께 이뤄지지 못하면서 정치권이 양당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 전 고문은 "우리 땐 국회 선진화법이 없어서 싸우고 그랬어도 여야 간 교류와 대화가 더 많았다. 그땐 정치 지도자들이 그렇게 유도를 했었다. 이에 대해서 언론은 여야간 뒷거래가 이뤄진다고 했고 그런 측면도 아주 없진 않았지만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더 많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를 고쳐가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개헌이 있어야 하고 정치 지도자들이 좀 더 여유를 갖고 여야간 화합을 도모해야 할 것"이라며 "여야가 서로 대화해서 굉장히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 때려죽인 원수들이 아니잖나. 정치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데는 정치 지도자들이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대화로 풀어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2018년 8월 당대표 수락 연설문에서 "최고 수준의 협치"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 성공, 총선 승리, 정권 재창출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국회를 돌아보면 대통령 중심제 하에선 '협치'와 '정권 재창출'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1등을 향한 여야간 유치한 싸움과 극한 대립은 4.15 총선 이후에도 반복될 게 뻔하다면 지나친 우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