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인권' vs '국민 알권리' 충돌…"기본권간 조화로운 법 개정 필요"
[더팩트ㅣ국회=허주열 기자]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 관행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특히 조국 법무부 장관 가족들에 대한 최근 검찰 수사 과정에서 잦은 피의사실공표가 이뤄지자, 당정은 무죄추정의 원칙과 인권보호를 앞세워 공보준칙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는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보도의 자유라는 또 다른 기본권과 충돌하는 면이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문화된 피의사실공표죄…처벌 사례 '0'건
형법 제 126조(피의사실공표)에는 검찰·경찰과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의자의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과 피의자의 인권보호 등을 위해 1953년 제정된 이 법은 개정 없이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는 관행처럼 이뤄져왔고, 현재까지 피의사실공표 혐의로 기소돼 처벌된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그동안 검경은 수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공소 제기 전 피의사실을 공표해 피의자를 압박하고, 유죄의 심증을 부추기는 여론전을 벌이는 등 관행적으로 형법 126조를 어겨왔다. 반대로 수사에 부담으로 작용할 때에는 형법 규정을 내세워 언론취재를 회피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진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들이 여과 없이 보도되고, 당사자는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범죄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또한 심리적 위축과 모욕감으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과 법무부는 18일 오전 국회에서 사법·법무개혁 당정협의회를 열고 피의사실공표 문제 개선책을 논의했다. 협의회에서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심각한 인권침해 요소로 지목되고 있는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며 "이 문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매년 반복적으로 지적됐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4월 법무부는 '수사공보TF'를 구성하고, 지난달에는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안'도 마련했다. 이를 두고 야당 쪽에선 특정 수사대상(조 장관 가족)에 적용하기 위해 지침을 개정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대해 조 의장은 "피의사실공표 개선책은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시절에 준비했던 것"이라며 "관계기관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현재 검찰에서 수사 중인 조 장관 가족 관련 사건이 종결된 후부터 적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선 조응천 민주당 의원 주최, 대한변호사협회 주관으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 관행 방지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당정이 예고한 '의견수렴의 장'이 당일에 바로 열린 것이다.
이 토론회에는 조 의원 외 송영길·윤관석·송기헌·이규희·송갑석·이상민 민주당 의원, 민갑룡 경찰청장,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조현욱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 김상겸 동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법무부 형사기획과 한지혁 검사, 경찰청 수사기획과 윤승영 총경 등 거물급 인사가 대거 참석해 피의사실공표 문제 개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발제자로 나선 김상겸 교수는 "헌법은 기소 전 수사대상인 형사피의자에 대해서도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며 "사회적 이슈가 되는 중요한 형사사건이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수사기관은 기소 전에 형사피의자의 피의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검찰이 해당 건에 대한 기소권도 갖고 있어 실제로 이 법으로 처벌받은 사례는 한번도 없다. 큰 논란 없이 사실상 사문화됐던 이 법은 지난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을 계기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검찰은 이듬해 법무부 훈령으로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이 준칙에는 기소 전 수사사건에 대해 일체의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예외적으로 중대한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를 방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한해 피의사실을 공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상위 규범인 형법에 배치되는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피의사실공표는 관행적으로 반복돼 왔고, 당정은 이번에는 반드시 이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나 피의자의 인권보장 못지않게 국민의 알권리 보장도 중요한 기본권이고, 두 기본권이 충돌할 경우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권과 알권리 고려해 조화롭게 법 제정해야"
김 교수는 "피의사실공표죄를 피의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권리 관계를 고려해 보다 조화롭게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국회에서 법률로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승영 총경은 "피의자 인권침해와 국민의 알권리는 모두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이고,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우위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공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익이 보호받아야 할 사익보다 현저히 큰 경우에 한해 공소제기 전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가 허용된다"고 말했다.
이어 윤 총경은 "수사공보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거나 형법 상 피의사실공표죄를 개정해 예외규정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며 "세부적인 방법론은 인권보호 측면에서 요건과 절차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상세히 정하고 있는 훈령의 내용을 가다듬어 법제화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으로 실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지혁 검사는 "이번에 (법무부에서)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했는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확정할 예정"이라며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국회 입법 논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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