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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1년. 상주본은 공개 직후 복잡한 사건들이 얽히고설키며, 소장자인 배익기(56) 씨만 아는 곳에 감춰졌다. 상주본은 과거 문화재청 감정평가에서 '1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국보급 고서다. 지난 7월 대법원은 상주본 소유권이 문화재청에 있다고 최종 판단했다. 그러나 배 씨는 여전히 상주본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더팩트>는 오는 10월 9일 한글창제 573돌 한글날을 앞두고 상주본 사태 11년간의 기록과 의문점을 파헤치고, 꼬일 대로 꼬인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해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진짜 주인' 논란부터 '상주본 상태' '가치'까지 의문점 많아
[더팩트ㅣ경북 상주=허주열 기자] 상주본 사태 11년의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여러 의문점이 존재한다. 최근 대법원이 상주본의 주인을 문화재청으로 재확인했지만, 그 과정에 쌓인 의문점이 적지 않아 아직도 이 사태가 풀리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문1. 상주본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첫 번째 의문은 상주본 소유권이 문화재청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석연찮다는 것이다. 상주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인사는 배익기 씨다. 하지만 배 씨가 언론에 상주본의 존재를 제보한 뒤 조용훈 씨가 갑자기 나타나 '배 씨가 상주본을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배 씨에 따르면 상주본 공개 직후 조 씨와 가까운 골동품상들에게 연락이 와 3억, 10억 원 등을 거론하며 매입을 타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배 씨가 명확한 답을 하지 않자, 조 씨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도난당했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유권 다툼은 민·형사 소송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사법기구에서도 실체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조 씨는 배 씨가 상주본을 공개(2008년 7월 30일 안동MBC)한지 12일 뒤(2008년 8월11일) 경북 상주경찰서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경찰은 도난당했다는 날짜 등 조 씨의 핵심 증언이 오락가락하고,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도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판정이 나오자 '내사종결' 했다. 이후 두 달 뒤 조 씨가 재차 민·형사 소송을 함께 제기했는데, 결과적으로 형사는 '배 씨 무죄', 민사는 '조 씨 소유' 판결이 확정됐다. 요약하면 배 씨가 상주본을 가진 상황에서 훔친 것은 아니지만, 소유권은 조 씨에게 있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 씨는 상주본을 돌려받지 못한 채 문화재청에 기증한다. 문화재청 누리집 도난문화재 정보 자료에는 상주본이 2008년 7월 26일 상주시 복룡동에 위치한 조 씨의 골동품점에서 도난당했고, 같은 해 10월 조 씨가 배 씨를 상대로 문화재 절도 혐의로 고소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듬해(2009년) 5월 배 씨는 대구고검에서 증거불충분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2010년 2월 조 씨가 제기한 소유권 이전 민사소송이 시작돼 2011년 5월 대법원이 조 씨의 손을 들어 준다. 하지만 배 씨는 상주본을 내놓지 않았고, 2012년 5월 조 씨는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문화재청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조 씨의 실물 없는 기증'이 근거다.
배 씨가 승소한 재판의 판결문에 따르면 조 씨는 상주본을 도난당한 날짜를 최초 2008년 7월 28일이라고 진술했다가, 그 전에 배 씨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게 확인되자 7월 하순으로 말을 바꿨다. 그러나 민사재판에선 배 씨의 진술을 배제한 채 조 씨와 조 씨 측 증인들의 진술만 받아들여 '배 씨가 조 씨의 골동품점에서 상주본을 훔쳤다'고 판단했다.
민사재판 담당 판사가 맡았던 1심 형사재판에서도 재판부는 "2008년 7월 26일 오후 배 씨가 조 씨의 골동품점을 방문해 상주본을 훔쳤다"는 검찰 기소를 받아들여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배 씨는 이날 낮 강모 변호사를 만나 상주본의 문화재 지정 건을 상담했다. 민사와 형사 1심 판결 자체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셈이다.
실제 배 씨가 형사재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은 대법원 판결문에는 "2008년 7월 28일 도난당했다고 주장한 조 씨의 경찰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며 "배 씨가 사전에 (조 씨가 가진) 상주본 가치를 알고 문화재 지정 절차를 문의 한 뒤 2008년 7월 26일 오후 상주본을 절취했다는 검찰 공소에 대해 '범죄의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원심(2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배 씨는 "조 씨의 형사소송 제기는 두 차례 무고로 사법당국이 판단했고, 세 번째 무고에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2·3심에서 무죄를 받았다"며 "훔치지 않았는데, 물건은 돌려주라는 이상한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 씨의 아내 이모 씨는 "배 씨는 상주본이 집수리를 하다가 발견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헌책을 옮기다 발견했다고 하는 등 오락가락 했다"며 "상주본은 남편 가문(풍양 조씨)에 내려온 것인데, (배 씨가 훔쳐간 뒤) 찾다 찾다 못 찾아 정부에 기증을 한 것"이라고 배 씨가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의문2. 실물도 안 보고 문화재 지정이 가능?
두 번째 의문은 실물도 보지 않고 문화재 지정이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상주본은 배 씨가 공개한 7~8월 이후 복잡한 사건이 얽히고설키며 배 씨만 아는 곳에 숨겨졌다. 심지어 배 씨의 형사재판 과정에서 형량 구형을 위한 상주본 감정 평가도 안동MBC에서 촬영한 영상 자료를 통해 이뤄졌다.
문화재보호법 제23조 '보물 및 국보의 지정' 조항을 보면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할 수 있고,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법 33조 '소유자관리의 원칙' 조항을 보면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해당 문화재를 관리 보호해야 하며, 소유자의 필요에 따라 대리해서 그 문화재를 관리·보호할 관리자를 선임할 수 있다.
상주본은 당초 배 씨가 문화재 지정을 시도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언론을 통해 존재가 세간에 드러났다. 이후 복잡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며 배 씨가 존재를 숨겨 이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럼에도 배 씨는 문화재 절도범으로 1심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1년가량 수감생활을 하다 2·3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측은 "상주본은 비지정문화재(일반동산문화재)로 문화재보호법 적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문화재보호법 제92조 '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조항을 보면 일반동산문화재인 것을 알고 일반동산문화재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효용을 해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나 2000만~1억5000만 원가량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형사재판에서 절도죄 '무죄'가 확정된 배 씨에게 이와 상충되는 민사재판을 근거로 일반동산문화재 손상, 절취 등의 혐의를 적용하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의원(14대)을 역임한 원광호 훈민정음보존회 회장은 "문화재 심사도 거치지 않았고, 등록 지정도 안 된 상태에서 배 씨가 국보 은닉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 이하의 행위"라고 꼬집었다.
√의문3. 못 찾은 것인가 안 찾은 것인가
세 번째 의문은 배 씨에 대한 사법절차 진행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압수수색 등 강제회수 시도가 있었음에도 찾지 못한 것과 관련한 의혹이다.
문화재청과 배 씨에 따르면 상주본 강제회수 시도는 민사 1차례, 형사 2차례 등 총 세 차례 이뤄졌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상주본을 찾지 못했고, 2015년 3월 배 씨의 자택에서 불이 났을 때 상주본 일부가 불에 탄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자택 벽 속에 숨겨 놓은 상주본이 세 차례 압수수색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압수수색을 할 때 재산상 가해는 할 수 없다"며 "당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했는데, 벽 속에 있는 건 골조를 파괴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배 씨가 잘 숨겼고, (문화재청이) 못 찾았다"고 해명했다.
√의문4. 29엽 vs 24엽 vs 13엽…상주본 상태는?
네 번째 의문은 상주본 상태에 대한 의문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인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7월 3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배 씨와 함께 출연해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상주본은 총 33엽(장) 중 배 씨가 지금까지 29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 내용을 잘 아는 전문가의 제보에 의하면 13엽에 불과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배 씨는 명확한 답은 피한 채 "말하기 곤란하지만 굳이 꼭 그렇게 알고 싶다면 13엽은 넘을 것"이라고 답했다. 안 의원은 재차 "화재 이후 손실이 많이 됐고, 13엽에 불과하다면 10억 정도 밖에 가치가 안 될 수도 있다"며 "가치가 정확하게 얼마인지 감정 평가에 응할 생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배 씨는 "모든 것이 순리적으로 풀려나가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해결이 될 것"이라고 답을 피했다.
안 의원은 통화에서 "13엽이라 주장한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제보자를 밝히기 좀 그렇다"며 "오랫동안 이걸 연구했고, 초기에 봤던 한 분의 주장이다. 배 씨가 13엽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고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상주본을 직접 살펴본 유일한 전문가인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관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은 총 3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상주본은 앞부분 8장이 없었고, 끝에 정인지서문 1장이 없어 총 24장이었다"며 "책을 한 장 한 장 검토하면서 문장 구성상 중간에 연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배 씨에게 물었더니, 빠진 부분은 본인이 별도로 분산해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배 씨는 상주본 상태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을 회피했다. 결국 29장이라는 것은 배 씨의 주장이고, 실제로 본 전문가는 24장만 확인한 것이다. 2015년 3월 배 씨의 자택에 화재가 발생한 이후 뒤늦게 그가 공개한 사진에 상주본 일부가 불에 탄 것을 감안하면 현재 상주본은 24장 안팎이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의문5. '1조 원' 가치라는데…실제 가치는?
상주본의 상태는 가치와도 직결된 부분이다. 문화재청은 2011년 검찰이 배 씨에 대한 형량 구형을 위해 의뢰한 감정 평가 요청에 대한 회신에서 "무가지보지만 굳이 값을 매기자면 1조 원의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1조'는 상징적 금액이고, '무가지보'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했다. 임 관장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대한민국의 국가 유산이라는 개념에 유의해 봐야 한다"며 "공식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누가 봐도 합리적이게 실물을 갖고 평가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세계 역대 경매 최고가 작품은 2017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4억503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5000억 원)에 낙찰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살바토르 문디'다. 세계 최고의 문자인 한글의 창제 원리를 밝힌 완전하지 않은 두 번째 고문서(첫 번째 간송본)가 이보다 높은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재 전문가는 "정확한 가치는 상주본 상태를 봐야겠지만, 공개된 상태, 화재로 인한 일부 소실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10억 원이면 충분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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