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 무드와 동북아 정세 변화에 이중적 대처
[더팩트ㅣ외교부=박재우 기자] 국제관계학 이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징인 독재자 히틀러(Hitler)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단 독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1차대전에 대한 무리한 배상 요구가 독일인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불러일으켜 히틀러를 등장시켰다는 해석이다.
국제관계학 이론에서는 국가 간 갈등의 원인을 주로 세 가지 관점에서 해석한다. △국가의 리더 개인에게 비중을 두는 관점(개인),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두는 관점(국가), △국제질서의 변화에 주목하는 관점(국제 정세)으로 나뉜다.
히틀러의 유년시절을 들여다 보며 그가 왜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는 방법이 첫 번째 해석 방식이다. 냉전 시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싸움, 중동 정세를 무슬림 국가와 유대·기독교 국가의 알력 다툼으로 바라보는 것이 두 번째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국제질서 변화 방법론은 국제사회를 무정부(Anarchy) 상태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최근 미·중 무역 갈등을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에 따른 세계 패권 다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현재 한일 무역 갈등은 어떨까. 일각에서는 일본의 경제보복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개인적인 의도로 추측하곤 한다. 참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속셈으로 일본 내 우파를 결집시키고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2/3 의석을 확보해 헌법 개정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다만, 일본의 '경제보복' 배경에는 아베 총리의 의식 기저에 바탕을 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앞서 언급한 세 번째 분석 방식을 적용해 보자. 동북아 질서가 한반도 평화 진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세변화가 일본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2018년 한해 한반도에 극적인 평화 바람이 불었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여,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5.26 판문점 원포인트 회담, 첫 북미정상회담인 6.12 싱가포르 회담, 9.19 평양 남북정상회담 등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평화 훈풍이 불자 주변 국가들이 어떠한 형식으로든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유일하게 일본은 '재팬 패싱'이라는 말을 들으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서 '한반도 평화'에 편승할 것이냐, 훼방할 것이냐를 두고 일본은 기로에 서 있다. 일본의 이 고민은 지난 4일 자행한 수출 규제 강화 조치 이유를 밝히면서 이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일본이 수출규제조치의 근거로 한국의 '대북제재 규정 위반'을 거론한 것은 한반도 갈등 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편 가르기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그동안 한반도의 갈등은 일본에 호재로 작용해 왔다. 6.25전쟁으로 일본 제조업이 다시 살아나 경제가 패전 이전 상태를 회복했다. 얼마나 좋았으면 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 총리(1878~1967)는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언급했을까.
또, 이 갈등이 지속된다면 일본은 '평화헌법' 개정으로 보통국가가 돼 동북아의 강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아베 총리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시나리오이다.
한편으로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따른 신뢰 저하를 경제 보복 이유로 삼은 것은 나름 한반도 평화 훈풍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와의 과거사 문제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해 향후 북-일수교에 대비하려 한다는 것이다.
북일관계 전문가 요시자와 후미토시 일본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교수는 '남·북·일이 함께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와 해결방안' 세미나에서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도 배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 대법원이 지난해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 북일교섭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 "일본 정부는 북한 정부와 제2의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으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성실하게 인정하지 않는 한 북한 정부와의 교섭은 시작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향후 북한과 협상에 대비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강제동원 개인청구권을 다룬 최종적인 협상이었다고 못을 박으려 하고 있다. 현재 일본이 우리와의 강제동원 배상 문제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만약 진정 일본이 한반도 평화에 편승하고자 한다면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아베 총리는 강경책을 자극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일 관계의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배상문제가 부담이 된다면 진정성 있는 사과를 먼저 한 뒤 남북에 양해를 구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아베 총리와 '평화'라는 단어는 다소 잘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